‘인생은 아름다워’ 농법[포도나무 아래서/신이현]〈50〉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3월 3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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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신이현 작가 ·프랑스인 남편 도미니크 에어케(레돔) 씨
신이현 작가 ·프랑스인 남편 도미니크 에어케(레돔) 씨
“저렇게 심으면 포도나무 다 얼어 죽을 텐데 말입니다. 프랑스 남자라서 뭘 모르나 본데 여긴 한국이라니까…. 겨울 못 넘겨. 그리고 포도밭에 저렇게 보리랑 귀리를 잔뜩 뿌려서 어쩌려고 해요?” 프랑스 남자와 대화가 안 되니까 내가 밭에 가면 이웃이 와서 이런저런 말들을 한다. 나는 걱정되지 않을 수 없다. “비 가림 하우스를 하지 않으면 겨울에 다 얼어 죽을 거라는데.” 내가 이렇게 말을 옮겨주면 그는 모욕당한 것처럼 찬바람을 휙 내면서 멀리 가버린다.

그냥 말을 전해주었을 뿐인데 저렇게 화를 내다니, 거기다 고집불통이기도 하지. 나도 괜히 화가 나서 그와 멀찍이 떨어진 작은 언덕으로 가서 일을 시작한다. 이 언덕은 밭 한가운데 있는 돌무더기 작은 산이다. 덕분에 개간되지 않았고 반쯤 야생인 상태로 내버려져 있었다. 나는 이 언덕을 ‘시어머니의 정원’이라고 부르고 둘러싼 과일밭은 ‘엄마의 밭’이라 부르기로 했다. 시어머니의 정원엔 꽃을 심을 것이고 엄마의 밭에는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사과나무, 갖은 먹는 열매를 심을 예정이다. 이렇게 이름 붙이고 나니 좋았다. 두 늙은 여자가 지켜주는 땅이니 앞으로 우리 인생은 아무 걱정 없겠지.

“어, 이게 뭐지? 내가 아는 나무 같은데….” 야생의 돌 언덕을 뒤덮은 복분자나무를 걷어내니 그 사이에 구불구불하게 바닥을 기어가는 굵직한 나무줄기가 나왔다. “아아, 이건 포도나무야!” 레돔이 와서 보더니 100년 동안 꿈꾸던 여자를 만난 것처럼 두근거리며 볼이 빨개졌다. 끌어안듯이 코를 땅에 대고 사방으로 뻗은 나무줄기를 따라다녔다. “바오바브나무 아니야? 넝쿨로 여기저기 온통 휘감고 있잖아. 당장 뽑아 없애야 돼. 내 정원을 다 망치게 생겼어!” 이런 일에 그는 내 말은 듣지도 않는다. 집착증 환자처럼 온 언덕을 샅샅이 뒤지더니 이윽고 결론을 냈다. 흥분하고 신이 난 표정이다.

“확실히 포도나무가 맞아. 그런데 어떤 품종인지는 싹이 나고 열매가 열려야 알겠군. 생긴 모양으로 봤을 때 일부러 심은 것 같지는 않고 사람이나 새가 먹다가 버린 씨앗에서 나온 싹이 나무가 된 것 같아. 재미있는 것은 이 언덕 남쪽을 다 덮고 있다는 거야. 어디 보자…. 전지(剪枝·가지치기)를 해서 뿌리마다 버팀나무를 세워줘야겠군. 어휴, 너 그동안 잘도 숨어 있었구나!” 그는 포도 넝쿨들을 하나하나 일으켜 세우며 사랑의 밀어를 퍼부어댄다.

“아마도 여긴 떡갈나무 숲이었을 것 같아. 이것 봐. 떡갈나무를 벤 둥치야. 100년은 된 것 같지 않아? 그냥 뒀더라면 참 좋았을 텐데!” 그는 이 언덕에 살다가 사라진 모든 나무들을 아쉬워한다. 특히 늙은 떡갈나무는 미생물을 폭발적으로 많이 가지고 있어 주변의 병든 식물들을 치유해준다고 한다. 그가 이런 이야기를 할 때면 정말 신기하다. 몇 년 전만 해도 그냥 월급쟁이 엔지니어였다. 어떻게 이런 것을 다 아는지 모르겠다. 떡갈나무신의 계시라도 받은 걸까.

“사람은 혼자 살 수 없잖아. 나무들도 여러 종이 함께 어울려 살 때가 제일 좋아. 모자란 것을 서로 주고받을 수 있거든. 포도밭에 복분자랑 복숭아나무, 보리수나무, 동설목을 심는 것은 서로에게 모자란 것을 주고받는 환경을 만들어주기 때문이야. 인간사회의 이상적인 민주주의 형태 같다고 할까. 특히 이 복분자는 500m까지 떨어진 떡갈나무 뿌리에 붙은 미생물들을 밭으로 데리고 와. 먼 숲의 소식을 알려주는 정령과도 같지….”

밭에서 듣는 레돔의 이런 이야기는 언제나 나를 괴롭히는 문제 ‘이런 식으로 농사짓고 술 만들어 먹고살 수나 있을까’ 하는 불안감을 사라지게 한다. 며칠 뒤에 다시 그것이 찾아온다는 것이 문제이긴 하지만.

“요즘 어떤 수도사의 농업 이야기를 읽고 있는데 정말 재밌어. 그 수도사 농법의 시작은 ‘인생은 아름다워’라는 거야. 이런 긍정적인 출발이 땅과 나무들을 건강하게 만든대! 그러니 나무가 얼어 죽을 거라는 둥의 비관적인 말은 안 하면 좋겠어.” 나는 반성하고 그런 바보 같은 말 대신 포도나무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래, 인생은 아름다워!”
 
신이현 작가
 
※프랑스인 남편 도미니크 에어케(레돔) 씨와 충북 충주에서 사과와 포도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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