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스토옙스키와 아이들[왕은철의 스토리와 치유]〈134〉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4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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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은 아이들에게서 배워야 합니다.’ 도스토옙스키의 명작 ‘백치’에서 주인공 미시킨 공작이 경험에 입각해 했던 말이다.

공작이 스위스의 어느 마을에 살았을 때였다. 어느 날, 아이들은 외국인인 그가 마리라는 여자에게 입맞춤을 하는 걸 보고 그를 조롱하기 시작했다. 오해였다. 그것은 이성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연민과 배려에서 나온 입맞춤이었다.

마리는 폐병을 앓으면서도 품팔이를 해서 어머니를 돌보는, 이해력은 조금 떨어지지만 착하고 순진한 스무 살 된 여성이었다. 그런데 어떤 떠돌이 프랑스인 장사꾼이 마리를 꼬드겨 데려갔다가 일주일 후에 길에 내팽개치고 도망치면서 사달이 났다. 그녀가 옷이 찢어져 몸이 다 드러난 채로 돌아오자 마을 사람들은 물론이고 어머니와 목사까지 그녀를 파충류 보듯 했다. 아이들마저도 돌을 던지고 욕을 했다. 어른들의 잘못된 생각이 그들에게로 옮아간 것이었다. 공작이 입맞춤을 한 것은 그런 마리가 안쓰러워서였다. 아이들은 그걸 보고 질색했다. 그러나 공작은 아이들이 던지는 돌을 맞아가며 그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너희가 잘못 알고 있는 거라고, 어른들이 가엾은 마리에게 근거 없는 돌팔매질을 하는 거라고, 마리는 정말로 착한 사람이라고 조곤조곤 설명했다.

공작이 아이들을 망쳐놓고 있다며 난리를 치는 비정한 어른들과 달리, 아이들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녀에게 상처를 줬던 일을 뉘우치기 시작했다. 그들은 그녀에게 용서를 빌고 가난한 그녀를 위해 음식, 신발, 양말, 속옷까지 몰래 가져다주었다. 그리고 그녀가 죽었을 때는 목 놓아 울었다. 순수해서 가능한 일이었다. 순수하기에 어른들의 편견을 물려받기도 했지만, 순수하기에 그 편견으로부터 쉽게 벗어날 수 있었다. ‘우리는 아이들에게서 배워야 한다’는 공작의 말은 그러한 아이들을 보고 체득한 신념이었다. 이것은 도스토옙스키의 일관된 신념이기도 했다. 그의 소설에 아이처럼 순수한 인물들이 자주 등장하는 이유다.
 
왕은철 문학평론가·전북대 교수
#도스토옙스키#백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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