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 사실을 보고 진실을 알리다[특별기고/김형석]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4월 1일 03시 00분


평양 시골마을서 모여 읽던 민족지
일제치하, 강제폐교,광복, 독재탄압 격동사 거치며 ‘삶의 일부’가 돼
자유와 인간애 지키는 등대역할 해야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90여 년 전, 내가 자란 고향 송산리(松山里)는 평양에서 8km쯤 떨어진 곳이다. 대동강 변 만경대에 인접해 있어 지금은 평양 시내로 편입돼 있다. 30호 정도가 야산으로 둘러싸인 농촌이지만 일찍부터 장로교 예배당이 있어 부근 몇 마을의 정신적 센터 역할을 했다.

조용한 마을에 한 주에 한 번씩 우편배달부가 다녀가면 그날 오후에는 몇 사람이 이장 집으로 모여든다. 편지를 찾아가고 이장이 읽어주는 신문 내용에 귀를 기울인다. 그때 신문이 동아일보였다. 모여든 사람들은 3·1운동을 치른 이들이어서 시국 변화에 관심이 많았다. 무슨 희망적인 소식이 있는지 궁금했고, 서울에서는 어떤 사건들이 벌어졌는지 알고 싶어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애국적인 관심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한 아주머니가 하던 말이 생각난다. “물레바퀴도 돌아가는 법인데 항상 이렇게 살기만 하겠나.” 역사에는 변화가 있는 법이란 뜻이다. 동아일보는 일찍부터 우리와 겨레의 벗으로 함께 자랐다.

나는 14세에 평양 숭실중 학생이 되었다. 3학년 가을 학기가 되면서 이상한 소문이 들려왔다. 우리 학교가 폐교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 당시 평양에는 기독교가 왕성했고, 교회가 설립한 여러 중등학교가 있었다. 그중에서도 숭실전문, 숭실중, 숭의여중은 ‘3숭(崇)’이라고 불릴 정도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세 학교의 교장은 모두 미국 선교사였다. 일본 총독부가 모든 학교에 신사참배를 명령했는데 3숭의 교장들은 거부했던 것이다. 그래서 일제는 한국인 교장으로 교체하고 신사참배를 하지 않으면 폐교시킨다는 엄명을 내렸다. 그런 소식은 평양 시민보다는 서울의 신문을 읽는 사람들이 정확히 알고 있었다.

마침내 선교사로 있던 윤산온 교장(조지 매큔·1873∼1941)이 학교를 떠나고 한국인 교장으로 바뀌면서 학생들은 신사참배를 강요당하게 되었다. 나와 몇 친구는 당황스러운 기로에 직면했다. 나는 고향 교회의 목사와 장로들이 신사참배 문제로 심한 고문을 받아 고생했고, 김철훈 목사는 교회를 떠난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신사참배를 할 수 없다는 결심을 했다.

학교를 자퇴한 나는 공부할 길이 없었다. 할 수 없이 등교 시간에 평양 부립도서관으로 가 신문을 보고 독서도 하다가 퇴교 시간이 되면 귀가하는 방법을 택했다. 고통스러운 세월이었으나 그 대신 뜻밖의 소득이 생겼다. 도서관에 비치돼 있는 여러 신문들 중에서 일제를 추종하는 신문과 민족주의 신문을 비교하게 되었고, 내 관심과 공감을 높여주는 동아일보를 매일 읽을 수 있었다. 숭실학교의 장래와 내 앞날에 대한 생각도 정리할 수 있었다. 그 당시의 독서가 나를 철학도로 이끌어 주었다. 신문에서 얻은 넓은 지식이 사회적 관심과 책임감 같은 인생의 암시를 주었다.

1년 후 다시 학업을 계속했으나 다음 해에 숭실학교는 끝내 폐교를 당했다. 우리는 제3공립중학교가 신설되면서 일본 학생과 공학하는 운명에 빠졌다. 3숭 학교는 모두 역사 무대에서 사라졌다. 그 시기에 이런 사실과 그 배후를 알려준 역할을 동아일보가 담당했다. 아픈 심정을 함께 느낄 수밖에 없었다.

광복과 더불어 역사의 방향은 완전히 바뀌었다. 일제 말기의 고난과 2년간의 공산치하를 거친 나는 1947년 10월에 중앙학교 교사로 채용돼 첫 직장을 얻었다. 인촌 김성수 선생 밑에서 동아일보와 한 식구가 된 셈이다. 고 김상만 회장과 친분을 가졌고 고 김병관 회장과는 사제 관계가 됐다. 박정희 정권 말기의 동아일보 탄압의 역사를 참아 넘겨야 했다. 지금 회상해 보면 인촌의 애국심이 동아일보의 정신이었고 그의 희망이 민족의 염원이었다. 나는 투병 중이던 인촌과 눈물을 삼키면서 기도를 드렸던 마지막 장면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2년 전에는 연세대의 내 제자와 함께 인촌상을 받았다. 스승과 제자가 한자리에서 상을 받는 것은 전무후무한 일일 것이다. 3월 28일은 내가 음력으로 100세인 생일이었다. 100년을 동아일보와 함께 살았다. 지금도 객원논설위원으로 집필할 때마다 앞으로 100년 후의 동아일보를 그려 보곤 한다.

신문에 주어진 책무는 확실하다. 사실을 사실대로 보아 진실을 찾아 알려주고 그 진실에 입각해서 독자와 국민들이 가치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일이다. 진실을 왜곡하거나 조작하는 세태가 될수록 진실을 지키기는 힘들다. 그러나 우리의 가치 판단의 기준은 뚜렷하다. 더 많은 사람이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데 있다. 그래서 언론은 밤길의 등불이 되지만 민족의 장래를 위한 등대의 역할도 감당해야 한다. 정권의 가치는 정의 구현에 있다. 그러나 역사는 정의가 평등의 수단이 아닌 인간애의 의무라고 가르친다. 법은 권력을 위한 도구가 아니다. 윤리적 질서를 위한 방법과 과정이다. 우리가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것은 자유와 인간애의 존엄성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동아일보#진실#가치 판단#자유#인간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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