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에 사는 사자와 하이에나는 지독한 라이벌 관계다. 만나기만 하면 서로 으르렁거린다. 덩치 큰 사자가 우세하긴 하지만 항상 그런 것도 아니다. 하이에나들이 떼로 덤비면 제아무리 사자라도 도망치는 수밖에 없다. 그래도 굳이 따진다면 사자가 넘버1, 하이에나가 넘버2다.
그런데 사람들의 평가가 이상하다. 사자들에겐 ‘라이언 킹’이라며 최고 대우를 해주면서 하이에나들에겐 그러지 않는다. 표범이나 치타가 애써 잡아 놓은 먹이를 빼앗아가는 기회주의자라고 미워한다. 하지만 사실 먹이를 빼앗는 건 사자도 못지않은데 왜 하이에나에게만 이럴까?
예전 아프리카 동부에 있는 세렝게티 초원에 갔을 때다. 막막한 느낌이 들 정도로 넓은 초원을 달리다 생각지도 않게 하이에나 세 마리와 마주쳤다. 다큐멘터리에서 숱하게 봤던 녀석들이라도 눈앞에서 직접 보면 신기해서 카메라 셔터 누르기 바쁜데, 이 녀석들에겐 그러고 싶지 않았다. 녀석들이 내게 어떤 행동을 했던 것도 아니었는데 마음이 시들해져 버렸다. 나만 그런가 싶었는데 일행 모두가 그랬다. 고정관념 때문이었을까?
이유가 있기는 있었다. 왠지 기분 나쁘게 웃고 있는 듯한 녀석들의 인상 때문이었다. 녀석들은 여느 네 발 동물과 달리 긴 앞다리와 짧은 뒷다리로 엉거주춤 서 있는 모습도 이상하지만 게슴츠레하게 노려보는 듯한 눈과 허옇게 드러낸 이빨은 정말이지 다가가고 싶은 마음을 싹 없앤다. 주는 거 없이 밉다는 말 그대로 보면 볼수록 기분 나쁘게 생겼다. 인상이 중요하다는 걸 새삼 느낄 정도다.
그런데 녀석들의 모습이 한국까지 따라와 내 오랜 생각 하나를 바꿔놓았다. 웬만하면 얼굴에 손을 대지 않는 게 좋다던 성형수술에 대한 생각을 지나치지만 않으면 하는 게 낫겠다로 변화시켰다. 녀석들이 괜한 미움을 받는 것 같은 일이 우리에게도 빈번할 수 있는 까닭이다. 더구나 우리는 무엇보다 얼굴을 중요시하지 않는가.
우리가 ‘당신을 본다’고 할 때 보는 건 팔다리나 몸통이 아니라 얼굴이다. 누군가를 그리워할 때 우리 마음에 떠오르는 것 역시 얼굴이다. 그래서 만나자고 할 때는 ‘얼굴 좀 보자’고 한다. 얼굴이 정체성의 핵심이라는 뜻이다. 나쁜 일을 하는 이들이 얼굴을 가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얼굴엔 우리 마음도 나타난다. 43개의 얼굴 근육으로 1만 개가 넘는 표정을 만든다. 얼굴은 단순히 눈과 코 같은 감각기관을 모아 놓은 곳이라기보다 중요한 의사소통 수단이다.
코로나19 사태로 얼굴 대하기가 힘들어지고 있다. 표정으로만 갖가지 이야기를 할 수 있는데 그럴 수가 없다. 이웃 팀이나 상사에게 다가설 땐 안색 살피기가 필수인데 그러지 못하니 난감한 일이 속출한다. 사회적 거리가 마음의 거리를 만들고 있다. 온라인이 활성화되면서 직접 대면이 힘들어질 때 우리는 이모티콘을 만들어내 간극을 채웠다. 이번에도 소통의 빈틈이 커지고 있는데 무엇으로 표정을 대신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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