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의 공정성까지 도전받고 있다[오늘과 내일/정원수]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4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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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보 무시’ 2004년의 실패 반복 않도록 대리시험, 엄정 수사 뒤 대책 재정비해야

정원수 사회부장
정원수 사회부장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2005년 6월 시행된 2006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 모의평가 때였다. 수험생은 1교시부터 마지막 교시까지 OMR 답안지의 왼쪽 상단 필적 확인란 두 칸에 윤동주 시인의 ‘서시’ 한 구절을 한 글자씩 적어야 했다. 그해부터 지난해까지 수능 때마다 필적 확인란 기재는 유지되고 있다.

필적 확인란을 도입한 계기는 2004년 11, 12월 발생한 사상 초유의 수능 부정사건 때문이었다. 휴대전화를 이용한 부정행위와 대리시험 등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된 조직적 범행으로 314명의 성적이 무효 처리됐다. 수능 폐지 요구까지 나오자 이듬해 2월 당시 교육인적자원부는 “이 사건을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겠다”면서 수능 부정을 방지하기 위한 고강도 대책을 내놨다.

핵심은 크게 두 가지였다. 우선 시험 관리 감독 강화를 위해 시험실당 응시자 수를 기존 32명에서 28명으로 줄이고, 전자기기의 반입을 금지했다. 대리시험 응시 시도를 원천 차단하기 위한 대책은 더 구체적이었다. 원서 접수 단계부터 본인 접수를 의무화하고, 기존 사진보다 큰 여권용 사진을 제출하게 했다. 1교시 시작 전에만 하던 본인 확인 절차를 3교시 전 한 차례 추가했다. 또 매 교시 감독관 2, 3명씩이 동일인 여부를 점검하게 해 수능 당일에만 수험생 1명당 감독관 9∼11명의 중복 검증을 거치게 한 것이다. 필적 확인란도 추후 필적 감정을 통해 동일인 여부를 가리려는 것이었다.

그 뒤에도 수능 부정은 매년 100건, 200건씩 불거졌지만 2004년과 같은 심각한 부정은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올 2월 국민권익위원회의 국민신문고에 수능 대리시험 공익제보가 접수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제보자는 공군 소속 병사 A 씨(20)가 부대 선임 B 씨(23)의 부탁을 받고 지난해 11월 수능에 대리 응시한 사실을 고발했다. 제보자는 국민신문고에 “대리시험은 몇 년간 최선을 다하여 수능을 준비한 인원들에 대한 모욕이자 대한민국의 수능을 기만하는 행위”라는 글을 남겼다.

서울시교육청이 1차 조사를 한 뒤 군과 경찰에 지난달 각각 수사를 의뢰하면서 베일 속 진실이 조금씩 드러나고 있다. A 씨는 주변에 “시험장에 폐쇄회로(CC)TV 그런 것도 없고, 생각보다 관리 감독이 허술하다”고 했다고 한다. A, B 씨의 군부대 동료들은 군 당국 조사에서 “한 명은 둥글둥글하고 살이 찐 편이고, 다른 한 명은 날카로운 인상에 마른 체형으로 생김새가 너무 다르다. 선임 사진으로 수능을 치렀는데 적발되지 않았다는 것을 납득하기 어렵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도 서울시교육청은 해당 시험장의 정감독관 4명에 대한 1차 조사에서 특이사항이 없었다고 9일 발표했다. 2004년 수능 부정 사건을 돌이켜보자. 수능 직전 교육청 홈페이지 등에 “유언비어라 생각하지 말고 엄정히 대처해 달라”며 구체적인 제보가 접수됐지만 당시 교육당국은 이 경고를 무시했다.

법조계에선 통상적으로 하나의 범죄에는 범죄예비군 10명, 100명이 있다는 말이 있다. 대리시험은 허술한 관리 감독의 빈틈을 노렸을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군 당국의 수사 자료에는 A 씨가 대리시험에 대한 대가로 1500만 원과 1억 원 등을 언급한 내용까지 있다. 철저한 수사를 통해 15년 만의 대리시험 응시가 빙산의 일각인지부터 가려야 한다. 그런 뒤에 수능 부정행위 방지 대책을 전반적으로 재정비해야 한다. 이른바 조국 사태로 스펙 위주의 수시 전형에 대한 공정성이 크게 위협받았다. 교육당국이 수능 위주인 정시 전형 비율을 늘리는 것을 대안으로 추진 중인데, 이번에는 수능의 공정성까지 도전받고 있다.
 
정원수 사회부장 needjung@donga.com
#수능#대리시험#엄격 수사#공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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