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의 예술가들은 예수의 죽음에 집착했다.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엘 그레코, 폴 고갱, 빈센트 반 고흐를 비롯한 수많은 예술가들은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의 마지막 모습을 재현하려고 노력했다. 예수의 시신을 안고 슬퍼하는 마리아의 모습을 형상화한 ‘피에타’가 많은 이유다. 그러한 예술품은 피에타, 즉 연민이나 슬픔의 감정을 느끼게 한다. 숙연한 종교적 감정이 동반되는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모든 예술품이 다 그러한 건 아니다. 독일 화가 한스 홀바인이 그린 ‘무덤 속의 그리스도’는 전혀 상반된 감정을 유발한다.
홀바인이 1521년에 그린, 실물 크기의 그림이 환기하는 감정은 종교적 감정과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다. 거기에는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를 때 채찍질을 당하고 십자가에 매달려 고통의 시간을 보낸 예수의 진짜 마지막 모습, 즉 소멸이 시작되기 직전의 시신만이 있을 뿐이다. 그림 속에는 아들의 모습을 보고 애도의 눈물을 흘리는 어머니도 없다. 갈비뼈가 드러난 앙상한 몸, 검게 멍이 든 손발, 감기지 않은 눈과 벌어진 입이 환기하는 감정은 죽음에 대한 공포다. ‘이런 그림을 보다가는 가지고 있던 믿음도 없어지겠어요.’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백치’의 주인공 미시킨 공작이 이 그림을 두고 했던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도스토옙스키 자신도 스위스 바젤에 있는 미술관에서 이 그림을 보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부활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것처럼 보이는 홀바인의 그림은 그것을 보는 사람을 허무주의나 무신론으로 이끌게 될까. 그렇지 않다. 신앙을 부정하는 듯 보이는 것을 극복하는 것이 참된 신앙이기 때문이다. 미켈란젤로의 우아하지만 현실 미화적인 ‘바티칸 피에타’보다 예수의 죽음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홀바인의 불편한 그림이 때로는 종교의 본질에 더 가까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결국 부활은 죽음의 무자비함에 대한 승리일 테니까. 그 의미를 생각하는 때가 부활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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