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하이는 21세기 마천루 도시다. 한국의 명동에 해당하는 난징루(난징동루) 지하철역에 내려 동쪽으로 걸어 나가면 와이탄이 나온다. 이곳 수변에 서서 황푸강 건너 푸둥을 보면 꽃 모양의 진마오타워(420m)와 병따개 모양의 세계금융센터타워(492m), ‘스크류바’ 모양의 상하이타워(632m)가 솟구친다. 상하이는 20세기 초에 이미 세계적인 마천루 도시였다. 그 시작은 어땠을까.
와이탄의 옛 이름은 ‘더 번드(The Bund)’였다. 번드는 영국인들이 봄베이(오늘날 인도 뭄바이)에서 인도인들에게 배운 힌두 공사용어로 ‘성토한 수변(워터프런트)’이었다. 영국은 식민지 국가에 내륙 수도의 ‘안티테제(반대 또는 상반되는 것)’로 수변도시를 즐겨 세웠다. 본래 중국의 전통 무역항은 광저우였다. 아편전쟁에서 이긴 영국 동인도회사의 휴 린지는 양쯔강과 태평양이 만나는 번드의 지리적 장점을 간파했다. 여기에 새로운 마천루 도시를 세우면 중국인들에게는 선진 과학기술 문명 소개라는 명분이 되고, 자신들에게는 양쯔강을 따라 전개되는 중국 거점 도시들과 무역할 수 있는 실리를 챙길 수 있었다. 영국인들은 치외법권, 무역관세, 항구 개방 등을 꼼꼼히 문서에 적었다. 돌아보면 1842년 난징조약은 ‘번드 건설 청사진’이었다. 홍콩과 마카오의 청사진이기도 했다.
영국은 번드를 황푸강(동쪽)과 우쑹강(북쪽)이 만나는 교차점에 세웠다. 영국 공사관은 사방으로 트인 번드 북쪽에 자리 잡았다. 우쑹강을 기준으로 남으로는 영국인 땅이었고, 북으로는 미국인 땅이었다. 영국인 땅 남쪽으로는 프랑스인 땅이었다. 번드에서 약 800m 아래에는 중국인들이 모여 사는 옛 읍성이 있었다. 19세기 중반 서양인들이 제작한 지도를 보면 중국인 읍성을 ‘차이나타운’이라고 명기했다. 마치 본토 중국인을 해외에서 건너온 이민자 취급을 한 주객이 전도된 이름이었다. 번드의 겉모습은 영광이었지만 속사정은 치욕이었다.
초기 번드 건축물들은 홍콩에서 데려온 건축가들이 홍콩 건물처럼 외부 조망용 베란다를 넓게 가진 마천루를 지었다. 이후 몇 번의 혹독한 겨울을 보내고 나서야 번드에 어울리는 건축은 런던, 뉴욕, 파리에 있는 고향 건축이란 것을 알았다. 번드에는 어느 나라 사람이 마천루를 세우느냐에 따라 런던의 고딕주의, 파리의 고전주의, 뉴욕의 기능주의로 나뉘었다. 글로벌 마천루 도시의 서막이었다. 태평천국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이를 추종했던 사람들이 조정의 칼날을 피해 번드로 몰려들었다. 급증한 주택(리룽 근대주거 개발) 수요로 부동산은 초호황을 맞았다. 적게는 15배에서 많게는 60배까지 올랐다. 마천루는 더 많이, 더 높이 솟았다. 백인들은 번드에 새로운 유형의 권력기관인 백인 중심 시청(Shanghai Municipal Council·1854년)을 만들었고, 상하이 최초의 영자 신문(1850년)을 발행했으며, 커피하우스와 클럽(1864년), 호텔과 경마장(1863년), 공공 공원 등의 백인 전용 문화시설을 지었다. 가스등, 전기, 상수도, 전차도 도입했다.
새로운 정치기구와 정보 유통, 문화는 마천루들과 시너지를 일으키며 무섭게 중국인을 흔들었다. 특히 한족(漢族) 출신의 지식인들과 상인들에게는 여진족 청나라 황실을 뒤흔들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했다. 번드는 개혁과 개방의 산실이 됐지만 동시에 중국의 방대한 철도권과 광산개발권 문제로 열강의 시한폭탄 관계를 감내하는 그릇이 됐다. 이후 번드는 숱한 혁명과 전쟁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으며 불황과 호황을 거듭했다.
마천루 도시로서 번드의 찬란한 영광은 일본이 진주만을 폭격하기 전인 1930년대였다. 이때 번드는 미국 밖에서 가장 빛나는 글로벌 마천루 도시였다. 1930년대 번드 스카이라인을 지배했던 마천루는 3개다. 런던 빅벤을 흉내 낸 시계탑 관세청 건물, 거대 돔과 대리석 로비를 가진 홍콩상하이뱅크(HSBC) 건물, 그리고 베네치아 산마르코 광장의 종루 캄파닐레타워를 벤치마킹해 지은 캐세이(Cathay) 호텔이다. 오늘날 상하이는 번드의 20세기형 초기 마천루들과 푸둥의 21세기형 초고층 마천루들이 황푸강을 사이에 두고 부르는 합창으로 도시 브랜딩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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