쌓이는 청구서, 실직… 코로나에 휘청이는 美 중산층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4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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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현장을 가다]
부촌에서도 어린이 무료급식 필요… 빚 많고 저축 적은 ‘모래 위의 성’
파산 직면한 ‘기그 근로자들’ 원성… 생계 위해 푸드뱅크로 인파 몰려
불안감과 두려움, 우울감 호소

뉴올리언스 길 한 모퉁이에서 ‘도움이 필요한 가족, 무엇이든 도움이 됩니다‘는 문구가 쓰인 박스 종이를 들고 있는 여자아이. AP통신에 따르면 이 아이의 어머니는 최근 코로나19로 실직했다. 뉴올리언스=AP 뉴시스
뉴올리언스 길 한 모퉁이에서 ‘도움이 필요한 가족, 무엇이든 도움이 됩니다‘는 문구가 쓰인 박스 종이를 들고 있는 여자아이. AP통신에 따르면 이 아이의 어머니는 최근 코로나19로 실직했다. 뉴올리언스=AP 뉴시스
이정은 워싱턴 특파원
이정은 워싱턴 특파원
슬라이스 치즈 6장이 들어간 동그란 빵과 브로콜리, 사과, 우유, 마요네즈, 드레싱 소스. 최근 찾아간 미국 버지니아주 페어팩스 카운티의 웨스트게이트 초등학교에서 나눠준 무료 급식이다. 간단한 한 끼 점심으로는 그럭저럭 먹을 만했지만 투명한 비닐봉지 속에서 엉킨 음식들은 다소 초라해보였다.

학교 정문 앞에 차려진 작은 천막 부스에 다가서자 마스크와 장갑을 낀 자원봉사자 세 명이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이들이 부지런히 나르던 스티로폼 상자 속에는 점심도시락 봉지가 가득 담겨 있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학교가 문을 닫으면서 점심 급식을 먹을 수 없게 된 아이들을 위해 시에서 마련한 무료 배급이다.

“매일 오전 11시부터 오후 1시까지 평균 150개, 최대 200개 정도의 점심 도시락이 나가고 있어요. 학생이 대부분이지만 어른도 2달러를 내면 도시락을 받아갈 수 있습니다.”

자원봉사자 글래디로 로코도로 씨가 말을 마칠 때쯤 자동차 한 대가 다가와 멈춰 섰다. 창문만 살짝 내린 한 남성 운전자가 도시락 2개를 받고는 그대로 학교를 빠져나갔다. 정오 무렵에는 아이를 옆에 태운 차들이 잇따라 들어섰다. 자원봉사자들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달라는 개수대로 봉지를 건넸다.

코로나19로 미국의 경제가 사실상 멈춰선 뒤 실직으로 수입이 끊긴 이들이 전역에서 속출하고 있다. 저소득층은 물론 재정상태가 불안정한 밀레니얼 세대와 중산층 가정의 상당수도 코로나19가 몰고 온 경제적 타격의 쓰나미를 피해 가지 못하는 모습이다.

코로나19 확산으로 일자리를 잃는 미국인들이 늘면서 이달 4일까지 최근 3주간 미국 실업 급여 건수는 1680만 건에 달했다. 7일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실업급여를 신청하기 위해 줄 선 사람들. 라스베이거스=AP 뉴시스
코로나19 확산으로 일자리를 잃는 미국인들이 늘면서 이달 4일까지 최근 3주간 미국 실업 급여 건수는 1680만 건에 달했다. 7일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실업급여를 신청하기 위해 줄 선 사람들. 라스베이거스=AP 뉴시스
○ 치솟는 실업률, 흔들리는 중산층

미 노동부 집계에 따르면 신규 실업급여 청구 건수는 지난주(3월 29일∼4월 4일) 약 661만 건이다. 앞서 2주 동안 신청한 건수를 합치면 3주 동안 실업급여 청구 건수는 총 1680만 건에 달한다. 한 달도 되지 않은 기간에 미 근로자 10명 가운데 1명 이상이 일자리를 잃은 셈이다. 코로나19가 본격 확산되기 전인 3월 둘째 주(8∼14일) 신규 실업수당 청구 건수가 28만2000건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충격적인 급증세다.

대부분의 식당과 가게, 쇼핑몰이 코로나19 확산을 막기 위한 영업중지 명령으로 문을 닫았다. 이런 상황에서 온라인 쇼핑몰 아마존 같은 소수 기업을 제외하고 신규 고용은 기대하기 어렵다. 디즈니월드는 12일 4만3000명의 근로자를 상대로 무급휴직을 시행하기로 했다. 항공기 제조업체 보잉은 해고와 조기 은퇴 등을 통해 전체 인력의 10% 감축을 검토하는 등 대기업들도 줄줄이 감원에 나서고 있다.

미 의회예산국은 역대 최저 수준(3.5%)이었던 미국의 실업률이 올해 2분기(4∼6월) 10%대로 뛰어오르고 내년 말까지 9% 밑으로 떨어지지 않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JP모건체이스는 2분기 실업률이 20%까지 치솟을 것이라는 전망까지 내놨다. 과거 대공황 당시의 실업률(10%) 및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악이었던 1982년의 경기침체 당시 실업률(10.8%)을 훌쩍 뛰어넘는 암울한 전망이다.

순식간에 일자리가 사라지면서 중산층도 위태로운 상황에 내몰렸다. 버지니아주 페어팩스 카운티처럼 부촌에 속하는 지역에도 학교 무료급식이 아니면 끼니를 챙겨먹기 힘든 저소득층 가정의 아이들이 생겨나고 있다. 이 지역의 방 3개짜리 타운하우스나 아파트의 월세는 3500달러 안팎. 모기지 대출과 집세 부담이 큰 미국에서는 고정적인 수입이 끊기는 순간 파산 위기에 직면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연방준비은행과 경제분석국(BEA)에 따르면 코로나발 경제 위기 이전에도 성인 10명 중 4명은 매달 수입에서 지출을 빼고 나면 수중에 400달러도 남지 않았다. 가구당 가처분소득 대비 저축률은 8.2%(올해 2월 기준)에 그친다.

○ 직격탄 맞은 ‘기그(gig) 이코노미’

팬데믹으로 얼어붙은 미국 경제는 무엇보다 ‘기그 이코노미’ 근로자들에게 직격탄이다. 기그 이코노미란 기업과 노동자가 고용 계약이 아닌 서비스 제공 계약을 맺고 일하는 형태의 경제활동을 뜻한다. 공유경제의 근간으로 평가받으며 미국의 성장을 주도한 이들은 코로나 사태를 맞아 근무 환경의 불안정성이라는 약점에 고스란히 노출됐다.

미 노동통계국에 따르면 지난해 미국에서 주급을 받는 근로자의 비율은 33.8%에 달한다. 3명 중 1명은 시간당으로 계산해 급여를 받는 계약직 근로자라는 의미다. 디지털 프로그램 개발자부터 우버 드라이버, 사진사, 케이터링 셰프, 행사 플래너, DJ까지 기그 근로자 형태로 근무하는 프리랜서의 수는 뉴욕에만 140만 명에 달한다. 최근 미 언론은 갑자기 일자리를 잃고 경제난에 허덕이는 이들의 이야기를 집중 조명하고 있다.

5년간 케이터링 사업을 해온 데이비드 커슈너 씨(35)는 크고 작은 홈파티와 비즈니스 리셉션 같은 일감이 몰리면서 최근까지 사업이 번창했다. 그러나 코로나19로 2개월 치 주문 예약이 모두 취소됐다. 지금은 비상시를 대비해 저축해둔 3만 달러로 생활하고 있다. 그는 “매출이 ‘제로(0)’ 상태까지 내려간 상태”라며 “사람들이 모여야 돌아가는 이벤트 사업 분야이다 보니 경기 침체에 곧바로 영향을 받는다”라고 말했다.

브루클린에서 교사로 일하는 제니퍼 어베이트 씨(36)는 개인과외와 아이돌봄 등 부업이 끊기면서 월 3000달러의 월세를 낼 수 없는 상황에 처했다. 피트니스센터 멤버십을 끊고 넷플릭스 시청도 중단했다. 그는 “코로나19로 내가 수입 지출을 맞추기도 힘든 취약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다. 우버 운전기사인 마이클 씨(41)는 지난주 10시간 동안 16건을 뛰고 103달러를 벌었다. 팁을 받는 횟수마저 절반으로 줄었다. 그는 “코로나19 이후 사람들이 너무 인색해졌다”며 “한 끼당 1달러 미만으로 식사를 해결하고 있다. 나는 파산했고 무섭다”고 하소연했다.

스턴트우먼과 영화업계 에이전트로 활동하던 데이나 모건 씨(38)도 지난달부터 일감이 끊겼다. 맨해튼의 한 레스토랑 웨이터로 일하던 남편도 같은 시기에 해고당했다. 출산할 아기를 위해 모아뒀던 저금을 깨서 월세와 전기료를 내고 있다는 그는 “이런 상황이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게 두렵다”고 말했다.

○ 2조 달러 긴급지원은 어디에

저소득층과 취약계층이 받는 타격은 ‘퍼펙트 스톰’ 수준이다. 당장 끼니 해결이 걱정인 이들이 무료급식소인 푸드뱅크로 몰리면서 평소의 8∼10배의 식량이 필요해졌다고 관계자들은 전했다. 노숙자들의 경우 코로나19 감염 위험에도 노출돼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더 심각하다.

오마하의 푸드뱅크에서 16년간 근무한 마이크 매닝 씨는 “허리케인 카트리나 때를 포함해 이렇게 심각한 상황은 본 적이 없다”고 했다. 미국 전역에 200곳의 푸드뱅크 지점을 운영하는 ‘피딩 아메리카(Feeding America)’는 향후 6개월간 14억 달러어치의 식량이 더 필요할 것으로 보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지난달 말 2조2000억 달러(약 2675조 원) 규모의 경기부양책을 내놓으면서 단기적으로 숨통을 틔워줄 것이라는 기대감도 없지 않다. 이 경기부양책대로라면 직장을 잃은 사람들이 주당 600달러의 실업급여를 최대 4개월 동안 지급받을 수 있다. 기존 실업급여 대상에 포함되지 않던 기그 노동자들도 포함됐다. 이와 별개로 연방정부가 지급하기로 한 성인 1인당 1200달러씩의 현금도 은행계좌로 입금이 시작됐다.

그러나 초반부터 업무 과부하가 걸리면서 곳곳에서 시행에 차질을 빚고 있다. 신청 절차를 밟기 위한 전화 통화조차 연결이 쉽지 않고 서류절차는 복잡하다. 실제 지원금을 받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다 보니 도움이 절실한 사람들에게는 체감도가 높지 않다. 아직 구체적인 지급 체계나 일정을 갖추지 못한 주 정부도 적지 않다고 로이터통신은 전했다.
 
이정은 워싱턴 특파원 lightee@donga.com
#기그 이코노미#코로나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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