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말고 또 누굴 사랑해?”(남자) “641명. 믿지 않겠지만 당신을 미치도록 사랑하는 나의 마음은 달라지지 않아.”(여자)
이게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냐고요? 혹시 사랑에 관한 ‘뉴노멀(New Normal)’이라도 생긴 거냐고요? 아니에요. 할리우드 영화 ‘그녀’(2014년)에 나오는 대사예요. 가까운 미래시대, 상처만 남은 결혼생활을 이혼으로 마감한 뒤 새로운 관계 맺기를 두려워해온 남자는 인공지능(AI)과 사랑에 빠져요. 스마트폰에 내려받은 인공지능 ‘그녀’는 어찌나 남자를 속속들이 이해해주고 살가우면서도 섹시한 목소리로 귀를 간질여 주는지 말이에요. 직접 만져볼 수 없다는 것 빼곤 다 갖춘 그녀에게 푹 빠져 지내던 남자는 종국엔 복장 터질 배신감과 마주하게 되어요. 그녀가 스스로 소프트웨어를 업그레이드해 수백 수천 명의 남자와 동시 접속해 연애를 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남자는 화나서 물어요. “넌 내 거야, 아니야?” 그러자 그녀는 답하죠. “당신 것이면서 당신 것이 아니야.” 결국 남자는 깨달아요. 참사랑은 어쩌면 상대와의 소통 차원을 넘어, 누군가를 사랑하는 나의 마음을 사랑하는 것이란 사실을요. 사랑의 본질은 네 것 내 것을 따지는 소유의 문제가 아니라, 죽을 때까지 스스로 떠안아야 할 지독한 고독에 있다는 사실을요.
아! 여기까지 쓰고 나니 감성 돋게 지나치게 잘 썼다는 생각이 들어 저 스스로가 너무 멋져 보여요. 하지만 여성들은 이 대목에서 정신 똑바로 차리셔야 해요. 영화 그녀 속 남자 주인공과 비슷한 깨달음을 가진 남자는, 영남에서 민주당, 호남에서 통합당 국회의원 당선자를 찾는 것만큼이나 힘들기 때문이에요. 물론 저도 포함해서요.
무슨 말이냐고요? 남자는 사랑을 소유와 지배의 개념으로 받아들여요. 여성이 사랑을 관계의 문제로 보는 것과는 다르지요. 얼마 전 개봉한 할리우드 공포물 ‘인비저블맨’이 딱 그런 영화예요. 광학기술자인 남편은 아내가 입는 것, 말하는 것, 생각하는 것 모두를 통제하려 들어요. 아내를 반려견보다도 못한 소유물로 보니까요. 그래서 아내가 도망친 뒤 남자는 첨단 광학복을 입고 투명인간이 되어 죽을 때까지 아내를 쫓아다니며 괴롭힌다는 얘기예요. 우리나라 ‘애마부인’만큼이나 유구한 시리즈를 자랑하는 일본 영화 ‘완전한 사육’도 마찬가지예요. 여자의 사랑을 얻으려는 ‘노오력(노력을 강조한 말)’을 기울이기보단 여자를 납치해 사육하려는 변태 행동을 통해 남성들의 소유욕과 지배욕을 은유한 내용에 다름 아니지요.
오죽하면 한국 영화엔 이런 명대사까지 나오겠어요? “남자는 한 여자의 과거가 되어줄 수 있는 용기를 가질 때 비로소 어른이 되는 것이다.” 뒤집어 말하면, 남자는 여자의 과거가 되어주길 거부하는, 영원히 철들지 않는 동물이란 얘기예요. 이별을 통보한 여자친구 집 앞에 그녀와의 성관계 사진을 붙인 남자가 얼마 전 입건된 국내 뉴스도 알고 보면 이런 수컷들의 뒤틀린 애정관이 극단적으로 나타난 사례이지요. 한 번 내 것은 영원히 내 것이니까요. ‘부부의 세계’란 드라마만 보아도 그래요. 의사 아내 덕에 먹고사는 무능한 남편은 젊은 필라테스 여강사와 바람난 사실을 들키고서도 “사랑에 빠지는 게 잘못은 아니잖아?”라고 뻔뻔하게 아내에게 소리를 쳐요. 그러면서도 이놈은 아내가 자기 동창과 맞바람을 피운 사실을 알고선 “네가 어떻게 그럴 수 있어?”라며 분개하잖아요? 여성을 존재가 아닌 소유로 보기에 일어나는 ‘내로남불’의 극치이지요. 이놈도 정치를 시켜야 할까 봐요.
요즘 난리가 난 ‘n번방’ 사건도 그래요. 핵심 용의자를 수사하는 과정에서 나온 이자들의 닉네임만 봐도 기가 막혀요. ‘갓갓’ ‘와치맨’ ‘박사’, 심지어는 ‘부따’도 있어요. 미성년자를 협박해 엽기적인 행위를 강요하고 성(性)을 착취하는 이자들은 자기가 무슨 전지전능한 신이라도 된 것 같은 비틀어진 환상 속에 살았어요. 알고 보면 인간시장을 차리고 여성을 통제하고 지배하고 학대하면서 자신이 아이언맨이나 슈퍼맨이라도 된 것 같은 미친 우월감에 젖는 것이지요.
아, 일부 몰지각하고 짐승 같은 남자들의 케이스를 가지고 모든 남자가 그러한 것처럼 침소봉대하고 있다고요? 물론 그렇지요. 하지만 그렇게 따지면, 코로나19에 감염될까 봐 우리가 무서워해야 할 이유도 없잖아요? 우리나라 확진자가 1만 명을 조금 넘는 수준인데, 확률적으로 보면 5000명 중 하나가 감염된 거잖아요? n번방 회원수가 최대 26만 명이란 보도가 있었고, 최근에는 줄이고 줄여도 유료회원 수가 1만 명은 될 거라는 추정까지 나오지요. 대한민국 남자 수가 대충 2500만 명이니, 남성 중 n번방 회원일 확률은 코로나19 감염의 2배에 달한다는 계산이 가능하고, ‘젊은 남자’로 범위를 줄이면 그 확률은 끔찍할 만큼 높아지니까 하는 얘기예요.
요즘 같은 때엔 영화 ‘여인의 향기(1993년)’ 속 알파치노 같은 고전적인 젠틀맨이 그리워요. 이 남자는 퇴역한 군인이고 사고로 앞을 보지 못하지만, 한 카페에서 우연히 마주친 매력적인 여성의 마음을 얻기 위해 무진 애를 써요. “오길비 시스터스 비누 향이 나네요” “웃음소리도 아름답군요”라면서 뛰어난 후각과 청각을 동원한 작업 멘트를 날리는가 하면, 탱고를 멋지게 함께 추면서 “스텝이 엉키면 그게 바로 탱고죠”라며 점잖고 여유로운 매너와 위트로 여자의 마음을 훔치지요. 맞아요. 사랑을 얻는 데에는 ‘뉴노멀’이 없어요. 언제나 ‘노오력’을 해야 해요. 장미꽃을 선물해야 하고, 스타벅스에도 가야 하며, CGV에서 영화도 함께 봐야 하지요. 멋진 말도 생각해내야 하고, 돈도 써야 하며, 피곤을 환한 웃음으로 가장해야 하기도 해요. 그게 바로 사랑이라고요. 제발, 공짜심리와 본전생각 좀 버리라고요. 엘리베이터 말고 계단으로 올라가는 게 진짜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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