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 듬성듬성 빗발 뿌리고 바람은 드세게 휘몰아쳤지./깊은 잠 이루고도 술기운은 사그라지지 않네./발 걷는 아이에게 넌짓 물었더니/해당화는 여전하다는 뜻밖의 대답./모르는 소리, 네가 알기는 해?/초록은 더 짙어졌을지라도 붉은 꽃은 져버린 게 분명하리니.
(昨夜雨疏風驟, 濃睡不消殘酒. 試問捲簾人, 郤道海棠依舊. 知否, 知否? 應是綠肥紅瘦.)
―‘여몽령(如夢令)’ 이청조(李淸照·1081∼1141?)
간밤 비바람에 스러져갈 봄꽃이 아쉬워 봄앓이라도 한 것일까. 흠씬 술을 마신 탓에 시인은 숙면을 이루고도 아직 취기가 다 가시지 않았다. 눈을 뜨자마자 불현듯 스치는 걱정. 얘야, 그 붉던 해당화는 다 지고 말았겠지? 아이의 대답이 심드렁하다. 그대론데요. 저에게는 바람 불고 꽃 피고 지는 게 그저 밋밋한 일상에 불과할 터, 개화든 낙화든 새삼스러울 것 하나 없는데 웬 수선인가 싶었을 것이다. 나이라는 짐짝에 짓눌리다 보면 자연의 성쇠나 계절의 변화에 유난스레 민감해진다는 걸 알 리가 없다. 그 무심한 대답을 힐책하듯, 생떼라도 부리듯 시인이 일갈한다. 네가 알긴 뭘 알아. 단언컨대 초록 잎은 무성해져도 꽃은 이미 다 지고 말았으리니. ‘녹비홍수’(綠肥紅瘦·초록은 살쪘을지라도 붉음은 야위었다), 떠나는 봄을 절묘하게 요약한 시인의 이 한마디는 봄의 끝자락을 형용하는 성어가 되었다.
이 작품은 노래 가사, 즉 사(詞)라는 송대에 유행한 운문이다. 노랫말 특유의 섬세함과 감성이 풍부했기에 내용이나 분위기가 시보다 자유롭되 엄숙한 맛은 덜했다. 사는 제목 대신 곡명을 사용했는데 ‘여몽령’이 바로 그것이다. ‘꿈결 같은 노래’쯤으로 이해하면 되겠다. 이청조는 여류시인으로 음악, 회화 그리고 금석학에도 일가견을 가진 팔방미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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