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말과 2월 중순 외국 출장을 다녀왔다. 먼저 1월 말에는 미국에 갔다. 그때 한국에는 이미 몇 명의 코로나19 확진자가 있었다. 미국도 비슷한 시기에 코로나가 발생했다는데, 내가 방문한 워싱턴과 뉴욕은 그 당시 조용했다. 나는 한국에서의 습관 때문에 마스크를 쓰고 비행기를 탔다. 미국에서는 마스크 쓴 사람을 거의 보지 못했다. 미국 친구들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다시 한국에 돌아갈 자신이 있느냐”고 묻기에 나는 “괜찮겠다”고 대답했다. 인천공항에 도착해 자동출입국심사 줄에 섰는데 이미 외국인은 자동출입국심사를 이용할 수 없었다.
그 다음 2월 중순에는 벨기에와 내가 태어난 네덜란드에 갔다. 유럽행 비행기를 타는 당일 한국에서 31번째 확진자가 나왔다. 그래도 크게 걱정스럽지 않았다. 그 당시만 해도 유럽에서는 확진 사례가 거의 없었다. 그런데 유럽에 머무르는 동안 한국에서의 확진자 숫자도 급증했다. 한국에 돌아올 무렵에는 확진자가 1000명을 넘었다. 친척들이 또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다시 한국에 갈 자신이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이번에는 약간 망설이면서 괜찮을 거라고 대답했다. 어차피 아내, 고양이, 집까지(중요한 순서로) 다 한국에 있다. 안 돌아가면 어디에 머물 수 있겠는가.
한국 집에 무사히 돌아온 이틀 후에는 확진자가 2000명을 넘었다.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에는 알 수 없었던 사실이지만 사실 바이러스는 이미 내가 방문했던 유럽 국가들로 퍼지고 있었다. 2월 말쯤 사촌형에게 연락이 왔다. 고령이고 건강 상태가 좋지 않은 자신의 아버지가 걱정된다는 문자였다. 이제 네덜란드의 확진자, 사망자 숫자는 한국보다 몇 배 더 많다. 미국은 말할 것도 없다. 나의 친구, 친척들이 오히려 나와 함께 한국으로 피신해야 했을까? 세상에 이런 비극적인 아이러니도 가끔 있다.
나는 매년 겨울 최소한 한두 번 감기에 걸렸다. 보통 2주를 앓는 동안 기침과 콧물이 많이 난다. 작년 1월에는 폐렴까지 갔다. 3일간 입원해 정맥주사로 항생제를 투여해야만 했다. 그 때문에 코로나로 인한 최악의 증상이 얼마나 심할지 짐작이 갔다. 특히 급성호흡곤란증후군의 경우 호흡을 제대로 못 하는 느낌을 알기 때문에 더 무섭다.
나와 내 아내는 한국에서 자가 격리, 사회적 거리 두기, 재택근무 정책을 엄중히 실천했다. 다소 과하게. 예를 들어 나갈 땐 꼭 마스크를 쓰고 소독젤을 바르고 아내의 감시하에서만 외출했다. 유럽에서 돌아왔을 땐 8주 동안 집에만 틀어 박혀 있었다. 매일 아내, 고양이와 집에서 밥 먹고, 집 청소하고, 필수품을 인터넷으로 주문했다. 배달이 불가능한 필수품을 사러 나갔다가 집에서 아옹다옹하기도 했다. 의견이 다른 것도 많았다. 이 가택연금 비슷한 기간이 더 길었더라면 아내와 나는 평생 다툴 것을 이번에 몰아 다퉜을지도 모른다.
다행히 오늘 이 블로그 원고를 마무리하는 날에, 8주 만에 내가 일하는 홍보회사 사무실로 출근했다. 2월 중순 유럽에 출장을 다녀온 뒤 처음이다. 그 사이 계속 거의 집에서 일을 했다. 다시 세상에 나와 사람들 속에 앉아서 일을 하니 묘한 느낌이 든다. 그동안 침묵 속에 있거나 아내와의 대화 소리에만 노출됐던 내 귀는 또다시 새로운 주변 소음에 익숙해져야 한다. 출근할 때 버스를 타는 것도 왠지 낯설다. 나도 모르게 버스 안에서 다른 사람 옆에 앉기를 꺼리고, 마스크를 안 쓴 사람을 불편하게 여기며, 심지어 기침이나 재채기를 하는 소리가 들리면 어디서 나는지 둘러보며 자리를 옮기거나 얼굴을 감쌀 생각부터 한다.
예전에는 한국에서 사는 것 자체가 행운이라고 생각했는데 요즘은 ‘정말 운이 좋다’고 생각한다. 바로 코로나19 때문이다. 한국 정부의 신속한 대응 덕에 코로나 사태는 빨리 진정세를 찾았다. 예전 같으면 북한이 미사일이라도 쏘면 유럽에 사는 친척들한테서 “괜찮냐”고 전화가 오곤 했다. 이렇게 안전한 곳에서 살고 있는 것도 모르고 말이다. 이제는 상황이 정반대다. 내가 오히려 다른 나라에 사는 친척, 친구, 옛 학우들을 걱정해야 한다. 게다가 지금 이것은 ‘실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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