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나무 심기 3차 농활, 이제 우리는 깔딱 고개를 넘었다. 4월 들어 총 1300그루의 포도나무를 심고 사이사이에 어우러져 포도나무의 친구가 되어 줄 다양한 품종의 나무들도 200여 그루 심었다. 아마존 산불로 사라진 나무들이 수안보 언덕 포도나무로 환생해 지구의 팔딱이는 초록 심장이 되기를 야심 차게 기도한다. 레돔 혼자 했더라면 석 달 열흘이 걸리고 앓아누웠을 일을 세 번에 걸쳐 모두 함께 끝냈다. 중참으로 100여 병의 시드르를 마셨고 동네 식당에서 된장찌개 100인분을 먹었다.
“이제 비만 쏟아지면 된다!” 그러나 비는 오지 않고 바람만 불었다. 시베리아 북서풍이 위이잉 무서운 소리를 내면서 불어 왔다. “이렇게 되면 정말 곤란한데!” 농부는 햇빛 가리개 모자 대신 털모자를 쓰고 밭으로 간다. 3000L의 물을 퍼 올려 땅을 적셔 보지만 금방 말라버린다. “정말이지 비는 언제 온다는 거야?” 레돔은 서울에서 내려온 빨간 장화 총각을 붙들고 애타게 묻는다.
“내일은 꼭 올 거예요. 저 하늘의 구름을 보세요!” 아이가 레돔을 안심시키지만 구름은 금방 도망가 버린다. 찬바람에 손가락이 얼어붙는 것 같고 귀가 시리다. 봄에 이런 바람은 큰일이다. 남쪽에서는 복숭아꽃 살구꽃 사과꽃이 다 얼어 버렸다고 한다. 두 남자는 북풍에 맞선 전사처럼 언덕 위로 한 걸음씩 나아간다. 농사일에 익숙한 레돔의 튼튼한 어깨에 비해 빨간 장화 총각은 아직 육체노동에 단련되지 않은 호리호리한 뒷모습이다. 멀리서 보면 아버지와 아들 같다. 한 번도 농사를 지어본 적이 없는 이 아이는 한 달 사이에 나무와 땅을 익히기 시작했다. 허리를 펼 때는 어구구 소리가 났고 얼굴은 까맣게 타고 손가락은 거칠어져 갔다. 그런데도 싫은 표정을 하지 않고 늘 웃는다. 농부가 되어 가는 그 모습이 내 마음을 짠하게 한다.
“이제 그만 집에 가자. 이러다 감기라도 걸리면 나는 책임 못 져.” 내가 이렇게 말하지만 두 남자는 들은 척도 않는다. 바람 때문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나무 외에는 관심도 없어 보인다. 네에 가야죠, 하고 말하지만 건성이다. 심어 놓은 나무뿌리들은 제대로 흙을 덮고 있는지, 가지에 움트는 새순을 조심스레 다듬고 옆에 난 풀을 잘라 토닥이며 덮어준다.
“이 실바너 나무는 살아날까요? 왠지 마음이 가요. 가지가 너무 나약한데 이쪽은 땅이 돌투성이라 살아날지 모르겠어요. 혹시 죽지 않을까요? 얜 내 나무로 할래요. 꼭 살아나게 돌볼 거예요!” 빨간 장화 총각은 가장 약해 보이는 나무에 자신의 이름표를 붙이고 보호망을 씌우고 밤낮으로 걱정한다. 어린 왕자의 장미처럼 이 나무도 꽤나 까탈스럽다. 아이는 코를 땅에 박고 포도나무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애를 쓴다.
“뭐, 뭐라고? 바람이 너무 많이 분다고? 아아, 그리고 뭐? 옆에 있는 쟤, 청수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아 그렇다면 잠깐만. 저기, 레돔 선생님. 얘 옆에 산딸기나무 같은 바람막이 나무 하나 심는 건 어떨까요?” 빨간 장화 총각이 이렇게 말하면 레돔은 곧바로 실바너 나무에게로 간다. 두 남자는 포대기에 감싸여 울어대는 아기를 들여다보는 것처럼 쪼그려 앉아 가만히 나무를 본다. 주변의 흙을 조심스레 매만지고 자갈들을 골라내며 긴 이야기를 한다. 바람 때문에 잘 들리지 않는다. 나무와 두 남자가 초자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느낌이 드는 뭉클한 모습이다. 이제 그들은 나무를 심었고 그들을 돌봐야 하는 운명을 걸머지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잠을 자다가도 나무 걱정에 잠을 설칠 것이다. 고달픈 농부의 운명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좋은 날도 있을 것이다.
신이현 작가
※프랑스인 남편 도미니크 에어케(레돔) 씨와 충북 충주에서 사과와 포도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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