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변당한 비너스[이은화의 미술시간]〈109〉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4월 30일 03시 00분


디에고 벨라스케스 ‘비너스의 단장(로크비의 비너스)’ 1647∼1651년경.
디에고 벨라스케스 ‘비너스의 단장(로크비의 비너스)’ 1647∼1651년경.
1914년 3월 10일 한 젊은 여성이 런던 내셔널 갤러리 안으로 급하게 들어왔다. 그러곤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누드화를 식칼로 일곱 군데나 난도질했다. 그림은 치명적 손상을 입었고 범인은 곧바로 체포됐다. 도대체 그녀는 무엇 때문에 그림을 훼손한 걸까? 그녀의 이름은 메리 리처드슨. 여성 참정권 운동을 위해 결성된 ‘여성사회정치동맹(WSPU)’의 회원이었다. 그림을 훼손한 이유는 이 단체를 이끌던 에멀라인 팽크허스트의 구속에 항의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현대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인물인 팽크허스트를 파괴한 정부에 대한 항의로 신화의 역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의 그림을 파괴하려고 했다.” 그녀가 밝힌 범행 동기다. 그랬다. 17세기 스페인 명화가 표적이 된 이유는 역대 누드화 중 가장 아름답다고 손꼽히는 걸작이기 때문이었다. 또한 이 그림은 영국민이 가장 사랑하는 누드화이기도 했다.

그림 속 누드의 여성은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큐피드가 든 거울을 바라보고 있다. 비록 뒷모습이지만 잘록한 허리와 풍만한 엉덩이, 희고 매끈한 피부를 가진 관능적이고 매혹적인 비너스다. 물론 관점에 따라선 남성의 관음적 시선으로 여성의 몸을 성적 대상화한 외설적인 이미지일 수도 있다. 그림이 그려졌던 당시 스페인에서도 여성의 나체는 금기시된 주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류층 남성들은 암암리에 누드화를 주문하고 수집했는데, 이는 누드화가 일종의 소프트 포르노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리처드슨도 하루 종일 이 그림 앞에서 입을 벌리고 바라보고 있는 남성들을 비판한 바 있다.

그녀의 행위는 전 국민의 공분을 산 명백한 범죄였지만, 결과적으로는 영국 사회에 의외의 결실을 가져왔다. 사건 이후 여성 참정권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이뤄져 1918년 처음으로 30세 이상 여성이, 1928년엔 모든 성인 여성이 투표권을 가지게 됐다. 심하게 훼손됐던 그림도 복원에 성공해 영국 미술품 복원 기술이 한층 진일보하는 계기가 됐다.
 
이은화 미술평론가
#디에고 벨라스케스#비너스의 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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