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계 부딪힌 ‘착한 임대인’ 운동[현장에서/주애진]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5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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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서울 인사동 거리에 ‘착한 임대인’ 운동을 지지한다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 동아일보DB
지난달 서울 인사동 거리에 ‘착한 임대인’ 운동을 지지한다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 동아일보DB
주애진 경제부 기자
주애진 경제부 기자
“일감이 뚝 끊겨서 가게 월세도 못 내게 생겼어요. 대출 받으면 그걸로 여름까지 월세는 내고 버틸 수 있을까 해서 온 거예요.”

서울 충무로에서 제본업체를 운영하는 송모 씨(63)는 1000만 원 한도의 소상공인 긴급대출을 신청하기 위해 27일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 서울중부센터를 찾았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각종 행사가 취소되자 그 충격이 팸플릿 등을 제작하는 제본업계까지 덮쳤다. 월 매출이 3분의 1로 곤두박질친 지금, 송 씨의 가장 큰 걱정거리는 매달 200만 원씩 내는 임차료다. 건물주가 임대료를 깎아주면 정부가 세액공제로 인하분 절반을 돌려주는 ‘착한 임대인’ 운동은 그에게 먼 이야기다. 송 씨는 “건물주들도 다 빚내서 산 건물인데 월세 깎아주기가 쉽겠나. 주변에서도 월세 내려줬다는 이야기는 못 들어봤다”고 했다.

올 2월 문재인 대통령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전주 한옥마을에서 시작된 착한 임대인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길 기대한다. 정부도 착한 임대인들에 대한 지원 방안을 모색하겠다”며 임대료 인하를 독려했다. 기획재정부 등 관련 부처는 올 상반기(1∼6월) 임대료를 인하한 건물주에게 세제 혜택을 주고, 참여율 20% 이상인 전통시장에 화재 안전 시설을 설치해 주겠다며 지원 사격에 나섰다.

하지만 현장에서 느끼는 체감 효과는 크지 않다. 서울 종로구 숭인동에서 오토바이 매매수리업체를 하는 A 씨(51)는 “주변 상인들 중 혜택을 봤다는 사람은 딱 한 명”이라며 “상인회가 조직돼 있는 시장은 말이라도 해볼 수 있지만 개인 자영업자는 불가능한 이야기”라고 했다.

졸지에 ‘나쁜 임대인’이 된 건물주들도 할 말은 있다. 임대인들이 모이는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대출 이자를 내야 하는 등 형편이 어려워 동참하지 못했는데 나만 나쁜 사람이 된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하다”는 글이 많이 올라온다. 한 임대인은 “이렇게 힘든 시기에 자발적으로 임대료를 인하해준 분들이 존경스럽지만 내 코가 석 자인데 임대료 깎아주고 그만큼 더 대출을 받아서 이자 내고 세금을 낼 순 없는 것 아니냐”고 했다. 또 다른 임대인도 “괜히 나만 야박한 사람이 된 것 같고 임차인과의 관계만 어색해졌다”고 털어놨다.

코로나19로 어려운 시기에 자발적으로 임대료를 깎아준 건물주들의 선의는 칭찬받아 마땅하다. 문제는 민간의 자발적인 참여로 이뤄져야 할 영역에 정부가 앞장서면서 마치 의무적으로 참여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가 조성된다는 점이다. 취지는 좋지만 민간 계약에 따른 임대료 문제는 처음부터 정부가 개입할 여지가 적은 분야다. 시민들 스스로 더 잘할 수 있는 분야는 민간 영역으로 남겨두고 정부는 소상공인 대출 확대 등 직접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정책에 더 주력하는 게 어떨까.
 
주애진 경제부 기자 jaj@donga.com
#착한 임대인 운동#건물주#대출#자발적 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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