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흥국의 경제 회복은 (선진국보다) 시차를 두고 훨씬 늦게 이뤄질 것이다. 많은 신흥국이 회복에서 뒤처지고, 새롭게 만들어질 글로벌 공급망에서 배제될 수 있다.”
미국 싱크탱크 유라시아그룹의 로버트 칸 글로벌전략담당은 지난달 21일(현지 시간) 미국 경제매체 CNBC를 통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에 따른 신흥국의 충격에 대해 이렇게 경고했다. 코로나19발 신흥국 위기는 아직 본모습을 드러내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미국 유럽 등 선진국은 코로나19 확산에 따른 봉쇄를 풀고 경제 정상화 채비에 나서고 있다. 다소 이르다는 지적이 있지만 선진국들은 재정 정책과 통화 정책을 방패삼아 조금씩 완화 수순을 밟고 있다.
반면 신흥국은 여전히 코로나19 사태의 한복판에 놓여 있다. 선진국들이 받은 충격이 워낙 크다 보니 주목받지 않았을 뿐 신흥국이 받은 충격도 심각하다. 금융시장에서는 대규모 외화가 이탈해 통화가치가 흔들렸다. 국가 신용등급이 하향 조정되며 자금 조달이 어려워졌다. 관광산업 비중이 컸던 국가들은 수입이 줄었고, 산유국이나 원자재 수출국은 유가 추락과 글로벌 원자재 수요 감소로 국가 재정에 비상등이 켜졌다. 신흥국 위기가 세계 경제 회복의 발목을 잡는 뇌관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 “90여 개국이 IMF에 ‘도와 달라’ 요청”
영국 이코노미스트는 지난달 11일 국제통화기금(IMF)에 도움을 요청한 나라가 90개국을 넘었다고 보도했다. 이코노미스트는 “신흥국 시장은 공공 의료 지원뿐 아니라 금융위기와 싸우고 있다”며 “당장 수입 대금 결제와 달러화 표시 빚을 갚는 데도 힘겨워하고 있다”고 했다.
그럼에도 신흥국의 상황은 덜 주목받아 왔다. 미국 유럽 등 선진국이 코로나19로 받은 타격이 워낙 크기 때문이다. 3일 기준 사망자수 세계 1위는 미국(약 6만6000명)이며 2∼7위도 유럽 선진국이 차지하고 있다. 사망률 1위는 프랑스(18.9%)이며 사망률 10%가 넘는 국가도 헝가리와 알제리를 제외하면 모두 영국 이탈리아 등 유럽 선진국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 여파로 각국의 1분기(1∼3월) 경제 성적은 처참한 수준으로 떨어졌다. 미국의 1분기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글로벌 금융위기 시절인 2008년 4분기 이후 최악인 ―4.8%(연율 기준)에 머물렀다. 유로존 역시 전기 대비 ―3.8%로 역성장했으며 유럽 주요국인 프랑스(―5.8%), 스페인(―5.2%), 이탈리아(―4.7%)도 큰 폭의 하락세를 보였다.
반면 신흥국이 입은 타격은 그동안 상대적으로 덜 드러났다. 인도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 주요 신흥국의 코로나19 환자 증가 속도는 3월까지는 선진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완만했다. 비록 중국이 1분기 ―6.8% 역성장을 했지만 코로나19 진원지였던 만큼 시장 반응은 극적이지 않았다. 미국 경기 침체로 큰 타격을 받을 것으로 예상됐던 멕시코는 1분기 ―2.4%를 기록해 상대적으로 양호했다.
하지만 신흥국을 둘러싼 우려는 갈수록 커지고 있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은 지난달 발간한 보고서에서 “동유럽, 남아시아, 아프리카의 주요 신흥국은 확진자가 4월 들어 빠르게 증가하는 중”이라고 지적했다. 지난달 29일 김용범 기획재정부 1차관도 “신흥국에서 코로나19 확진자 수가 빠르게 증가한 데다 금융시장 불안 조짐도 나타나고 있다. 신흥국 불안이 글로벌 경제의 하방 리스크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고 짚었다.
○ 의료 체계, 재정 부실… 신용등급 강등 줄이어
신흥국 위기론에는 신흥국의 의료 수준과 재정 상태가 선진국에 미치지 못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 보고서에 따르면 주요 신흥국 중 인도 인도네시아 남아프리카공화국 등의 보건의료 품질 및 접근성 지수가 국제 평균보다 낮았다. 주요 신흥국의 인구 1000명당 병상 수도 대부분 국제 평균에 미달했다. 멕시코는 느슨한 방역 수준을 유지하다 지난달 말부터 확진자와 의료자 감염이 급증하자 혼란을 겪고 있으며 브라질은 사회적 거리 두기를 놓고 대통령과 보건부 장관, 지방정부가 다툼을 벌이는 상황이다.
더 큰 문제는 경제 분야다. 지난달 17일 국제금융센터가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코로나19가 전 세계적으로 확산하면서 1월 21일부터 3월 말까지 신흥국에서 유출된 자금 규모는 980억 달러(약 119조5600억 원)로 집계됐다. 2008년 금융위기 때의 3배 이상이자 역대 최대 규모다. 코로나19가 신흥국 위기를 증폭시키는 촉매제로 작용할 수 있다는 얘기다.
외국인 자본이 빠져나가자 신흥국 통화 가치는 급격히 하락했다. NH투자증권에 따르면 2월 말 대비 지난달 28일 기준 멕시코 페소화의 미 달러화 대비 가치는 ―23.69% 추락했다. 브라질 헤알화(―23.06%)는 사상 최저치를 경신했고 남아공 랜드화(―19.18%), 터키 리라화(―11.84%)도 큰 폭의 하락세를 보였다.
문제는 미국 유럽 금융시장이 대규모 유동성 공급 등으로 안정세를 찾아가고 있음에도 신흥국으로 자금이 되돌아오지 않고 있다는 데 있다. 신흥국 통화 가치 약세가 유지되자 외채 비중이 높거나 GDP 대비 재정적자 규모가 큰 신흥국에는 경고등이 들어온 상황이다.
이미 국제 신용평가사들은 신흥국 신용등급을 빠르게 하향 조정하고 있다. 3월 이후 주요 신흥국 중인 멕시코 남아공 아르헨티나 브라질 나이지리아의 신용등급이 내려갔다. 인도네시아 베트남은 전망이 하향 조정됐다. 아르헨티나는 지난달 한 달 동안의 채무불이행(모라토리엄)을 선언하기도 했다. 코로나19로 신흥국 시장에 대한 투자가 좀처럼 이뤄지지 않는 상황에서 환율에 대한 부담, 신용등급 하향 조치로 채무를 갚기조차 힘겨워지고 있는 것이다. 하건형 신한금융투자 연구원은 “사태가 장기화될수록 달러화 부채 부담이 높은 국가를 중심으로 대외건전성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 신흥국 위기 시작도 안 해… 한국도 대비해야
세계 경기 침체로 원자재 수요가 줄어든 점도 신흥국의 위험 요인이다. 세계 최대 원자재 소비국인 중국은 올해 성장률이 1, 2%대로 예상됨에 따라 원자재 수입이 크게 줄어들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이미 원유 시장에서는 수요 감소로 인해 미 서부 텍사스산 원유(WTI) 선물이 사상 처음으로 마이너스(―) 거래되는 충격을 겪으며 산유국들의 재정 악화가 우려되고 있다. 주요 광물의 가격 하락으로 자원 수출 비중이 높은 남미권과 아프리카 국가들의 경상수지 악화도 예상되고 있다.
선진국들은 코로나19에 따른 경제적 혼란을 줄이기 재정 지출을 늘렸으며 중앙은행은 돈 풀기를 통해 이를 지원했다. 하지만 신흥국의 대응 수단은 제한적이다. 국제금융센터에 따르면 신흥국 정부 부채는 10년 전에 비해 2.3배 늘어나며 같은 기간 선진국(1.4배)보다 재정 여력이 축소된 상황이다. 가뜩이나 약화된 자국 통화가치 탓에 금리 인하 등 통화 정책을 적극 활용하기도 어렵다.
신흥국의 경제 규모가 선진국에 비해 작다 보니 세계 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크지 않을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하지만 신흥국에 경제 위기가 발생하면 선진국 시장도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선진국 시장 역시 여전히 불안정하다 보니 신흥국에서 발생한 위기를 얼마나 흡수할 수 있을지 예측하기도 어렵다. 조영무 LG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중국을 제외하고 신흥국이 코로나19를 제대로 겪었다고 보기 어렵다. 감염자가 어느 정도 발생했는지 정확히 확인이 안 된 측면도 있는 것 같다”고 우려했다.
신흥국 위기가 발생한다면 한국 역시 직간접적 타격을 피할 수 없다. 실물 측면에서는 신흥국으로의 수출이 더뎌지거나 감소할 수 있다. 코로나19가 신흥국에 본격적으로 창궐하면 이들 국가와의 무역은 차질이 불가피하다. 이들 국가에 공급망이 있거나 생산기지를 세운 기업은 심각한 타격을 입을 수 있다.
3월 주식시장 붕괴 때 경험했던 대규모 외국인 자금 이탈이 재연될 수도 있다. 강현주 자본시장연구원 거시금융실장은 “한국은 금융시장에서 여전히 신흥국에 포함돼 있어 신흥국 금융시장에 대한 불안감이 한국으로도 전이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소규모 개방경제인 우리 현실에서 신흥국 위기를 강 건너 불구경하듯 볼 수 없는 이유다. 우리 금융시장이 다시 패닉에 빠지지 않도록 긴장을 늦추지 말고 철저히 대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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