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1월 미국 인디애나주 오스틴 지역에서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HIV)가 발병했다. 마약 중독자가 대부분인 감염자들이 주사기를 공유해 인구 4200명의 작은 마을에서 들불처럼 HIV가 번졌다. 당시 주지사는 ‘마약 복용자가 깨끗한 주사기를 쓰면 HIV와 C형 간염의 발병이 감소한다’는 연구 결과를 무시했다. 주사기를 보급하면 중독자만 늘어날 뿐이라는 본인 주장을 고집하며 주삿바늘 교체 의무화 명령을 질질 끌었다.
임산부 및 고령 환자가 등장하고 보건당국자들이 긴급사태 선포를 촉구해도 “감염자가 집에 가서 기도하면 된다”는 상식 이하의 발언을 했다. 그는 최초 발생 후 반년이 흐른 2015년 5월에야 ‘뒷북’ 바늘 교체를 명했다. 불과 30일짜리 한시적 조치였고 주 정부 예산은 안 쓴다는 조건이었다. 하지만 이미 인구의 5%가 넘는 215명이 감염됐다. 전문가들은 교체 명령이 빨랐다면 127명의 감염을 막을 수 있었다고 개탄했다.
문제의 주지사는 최강대국의 2인자 겸 미국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총책임자인 마이크 펜스 미 부통령이다. 폴리티코 등이 전한 이 사례는 과학을 불신하는 지도자가 그 어떤 바이러스나 질병보다 위험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는 2000년 연방정부의 돈이 동성애자를 이성애자로 전환시키는 치료에 쓰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 해 뒤 담배와 암의 상관관계도 부정했다. 이런 주장을 하면서 과학적 근거를 내세우지도 않았다. 지난달 28일 마스크를 쓰지 않은 채 대형병원을 활보해 큰 논란을 빚은 그의 행보가 단순 부주의였을지 고개를 갸웃하게 만든다.
독실한 복음주의 개신교도인 그는 6선(選) 하원의원과 주지사를 거쳐 부통령에 올랐다. 정계 입문 후 내내 반(反)낙태·동성애 행보로 일관했다. 주지사 시절 낙태를 희망하는 여성이 반드시 사전에 초음파 검사를 받고 낙태 후 장례식까지 치르도록 하는 법을 만들었다. 연방대법원에서 가로막혔지만 굴하지 않고 수정란을 사람으로 인정하는 법 등 유사 법안을 발의했다. 의회에서 진화론을 부정하는 연설도 했다.
퓨리서치센터에 따르면 미국인의 25%는 ‘최고 존재가 진화를 인도한다’고 믿는다. 스스로를 복음주의자로 규정한 유권자도 35%다. 집권 공화당 주류로부터 인정받지 못했던 ‘아웃사이더’ 도널드 트럼프가 대선 후보를 거쳐 백악관 주인에 오른 이유 중 하나도 복음주의 유권자의 절대 지지를 받는 펜스를 부통령으로 골랐기 때문이다.
개개인의 종교적 신념은 물론 존중받아야 한다. 그러나 자연인이 아닌 지도자가 자신의 뜻에 동의하지 않는 대중에게 그 신념을 강조하는 건 다른 얘기다. 특히 보건 위기에 과학보다 종교를 우선시하면 사회 전체가 피해를 입는다. 인디애나 HIV 사태 때 펜스 주지사가 보인 행보는 코로나19 위기를 맞이한 트럼프 대통령의 모습과 놀랍도록 유사하다. 전문가 무시, 늦은 대처, ‘살균제 주입’ 같은 황당무계한 언급….
둘의 차이는 한 사람은 ‘돈’, 다른 이는 ‘신념’에 의해 움직인다는 데 있다. 많은 이들이 트럼프 대통령이 초기 코로나19 사태를 오판한 이유로 ‘중국의 손해가 미국에는 이익’이란 단순 논리에 기댔기 때문으로 본다. 특히 탈(脫)중국을 선언한 각국 대기업이 미국으로 돌아와 자신의 재선에 기여할 것이란 기대가 컸다. 미국 사망자가 7만 명에 육박했는데도 전문가 경고를 무시하고 경제 정상화를 서두르는 이유 역시 그래야 재선 유세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 세계의 중심에 ‘돈’이 있다면 펜스에겐 ‘신(神)’이 있다. 그는 자신을 ‘기독교인, 보수주의자, 공화당원’ 순서로 소개한다. 이런 그가 내린 결정이 온전히 과학적 증거와 의료 전문가의 조언에 기반했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트럼프 대통령이 재선에 올인할수록 코로나19 대응을 관장하는 부통령의 입지가 커진다. 세계 최대 감염국인 미국의 확산세가 끝나야 세계도 정상으로 돌아온다는 점에서 펜스의 행보를 우려할 수밖에 없다. 미 초대 부통령 존 애덤스는 ‘인간이 발명한 가장 하찮은 자리가 부통령’이라고 자조했지만 세계는 그 어느 때보다 영향력이 큰 부통령을 만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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