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라마단 풍경도 바꿨다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5월 7일 03시 00분


[글로벌 현장을 가다]
중동서 사라진 예배와 이프타르
얼어붙은 소비… 임금 삭감도 임박
열악한 위생 환경, 방역도 한계… 라마단 이후 사태 악화될까 걱정

지난달 20일 이집트 카이로의 레하브 전통사장에서 마스크와 천으로 입을 가진 고객들이 식료품점 야외 매대를 둘러보고 있다(왼쪽 사진). 3월 7일 사우디아라비아의 이슬람 성지인 메카의 모스크에서 인부들이 성스러운 검은 돌 ‘카바‘가 있는 광장을 소독하고 있다. 카이로=이세형 특파원 turtle@donga.com, 메카=AP 뉴시스
지난달 20일 이집트 카이로의 레하브 전통사장에서 마스크와 천으로 입을 가진 고객들이 식료품점 야외 매대를 둘러보고 있다(왼쪽 사진). 3월 7일 사우디아라비아의 이슬람 성지인 메카의 모스크에서 인부들이 성스러운 검은 돌 ‘카바‘가 있는 광장을 소독하고 있다. 카이로=이세형 특파원 turtle@donga.com, 메카=AP 뉴시스
이세형 카이로 특파원
이세형 카이로 특파원
5일 오후 6시 30분(현지 시간)경 이집트 수도 카이로 남부의 외교공관 밀집 지역인 마아디를 찾았다. 5분 뒤 인근 모스크에서 일제히 아잔(이슬람교에서 기도 시간을 알리는 소리)이 울려 퍼졌다. 무슬림의 하루 5번 기도 중 4번째 기도를 뜻하는 ‘마그리브’를 알리는 소리였다.

마그리브는 라마단(이슬람 성월) 기간 중 특히 중요하다. 해가 떠있는 동안에는 식사를 할 수 없지만 일몰 시간대를 뜻하는 마그리브 이후에는 음식을 먹을 수 있다. 모스크 주변을 둘러보는 기자에게 나이가 지긋한 관리인이 “이집트에 언제 왔냐. 이렇게 조용한 라마단을 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기자가 답하기도 전에 “이렇게 썰렁한 라마단은 생전 처음”이라고 덧붙였다.

올해 라마단은 지난달 24일부터 이달 23일까지다. 원래대로라면 이슬람권 전체가 최대 명절을 맞아 들썩여야 하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가 라마단까지 삼켜 버린 분위기다. 이날 모스크 안팎에서도 기도하는 사람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라마단의 전형적인 풍경으로 꼽히는 ‘이프타르’(금식 뒤 단체 식사)를 준비하는 모습도 사라졌다.

○ 모스크 문 닫고 성지순례 금지

코로나19는 전 이슬람권에서 기승을 부리고 있다. 6일 국제 통계사이트 월드오미터에 따르면 터키(12만9491명), 이란(10만1650명), 사우디아라비아(3만251명), 파키스탄(2만2550명), 카타르(1만7972명), 아랍에미리트(UAE·1만5192명) 등 주요국 확진자가 모두 상당하다.

공식 확인된 감염자 수는 아직 적지만 오랫동안 전쟁과 내전을 겪어온 아프가니스탄, 예멘, 시리아 등에서도 본격적인 확산이 시작됐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중앙정부의 기능이 유명무실하고 의료체계도 사실상 붕괴돼 향후 인명 피해가 급속도로 커질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국제구호위원회(IRC)는 최근 “아프간, 시리아, 예멘을 포함한 취약 국가에서 최고 320만 명의 코로나19 사망자가 발생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중동 각국은 코로나19 확산을 막기 위한 야간통행금지, 이동제한, 영업중단 등을 시행하고 있다. 특히 과거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모스크 폐쇄 같은 초강수도 불사했다. 신자가 밀집한 모스크에서 ‘사회적 거리 두기’가 불가능하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신정(神政)일치 국가인 이란의 고위 성직자들도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모스크가 아니라 집에서 기도해도 된다”고 말할 정도다.

이슬람 성지 3곳 중 2곳인 메카와 메디나를 보유한 사우디도 마찬가지다. 사우디는 3월부터 외국인의 성지 방문을 금지했다. 자국민의 메카와 메디나 방문도 거의 허용하지 않는다. 라마단 때도 이를 유지한다. 사실상 성지를 폐쇄한 셈이다.

각국은 저소득층과 이주 노동자들을 위한 공공장소에서의 대규모 이프타르도 금지하고 있다. 이프타르를 하는 동안 사회적 거리를 유지하기 어렵고, 음식을 나눠 먹는 행사의 특성상 심각한 집단 감염 위험이 있다는 지적을 받아들였다.

국제구호단체에서 20년 이상 활동한 한 중동전문가는 “예멘, 레바논, 아프간처럼 정세가 불안한 지역에 있을 때도 올해처럼 조용한 라마단을 본 적이 없다. 라마단에 모스크를 폐쇄하는 것을 보면 중동 전체가 코로나19에 얼마나 긴장하고 있는지 느낄 수 있다”고 전했다.

○ 냉기만 도는 ‘라마단 경기’

종교 활동뿐만 아니라 라마단 경기도 차갑게 얼어붙었다. 기자는 라마단 시작 직전인 지난달 20일 카이로 신도심 뉴카이로에 있는 레하브 전통시장을 찾았다. 라마단 직전이고 퇴근 시간인 오후 5시경인데도 시장 전체가 한적했다. 라마단 때 즐겨 먹는 대추야자 열매, 견과류, 과자 등을 파는 가게에도 손님이 거의 없었다.

가게 입구 앞에 놓인 테이블로 대추야자 열매와 견과류를 넣은 상자를 나르던 가게 점원은 “지난해와 분위기가 정말 다르다. 야외 이프타르가 금지돼 대량 주문이 사라졌다. 일반인도 예년보다 상당히 적게 구입한다”며 한숨을 쉬었다.

시리아식 양고기와 닭고기 구이를 파는 식당도 썰렁했다. 저녁 식사 시간인데도 주문을 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라마단 특수’를 묻자 종업원은 “올해는 기대조차 안 한다”고 퉁명스레 답했다. 인근 상인과 주민들 역시 “평소에는 라마단 때마다 화려하게 시장 주변을 장식했지만 올해는 거의 안 할 듯하다”고 입을 모았다.

이집트보다 훨씬 잘사는 걸프지역 산유국의 라마단 경기에도 냉기가 느껴진다. 특히 코로나19로 가속화한 유가 하락 때문에 오일머니로 먹고사는 중동 전체가 힘겨워하고 있다.

세계적인 쇼핑 천국으로 꼽히는 UAE 두바이의 소비는 최근 유래를 찾기 힘들 정도로 얼어붙었다. 두바이 정부는 3월 말부터 쇼핑몰 영업을 금지했다. 아랍뉴스에 따르면 UAE 구매관리자지수(PMI)는 3월과 4월 각각 45.2와 44.1을 기록해 두 달 연속 기준치인 50을 밑돌았다. UAE 양대 항공사인 에미레이트항공과 에티하드항공의 국제선 운항도 거의 중단됐다.

사우디 역시 라마단 직전까지 수도 리야드 등 주요 도시에서 24시간 통금을 실시했다. 그런데도 확진자가 계속 늘고 경제도 침체되자 평화롭고 풍성해야 할 라마단 시기에 ‘구조조정 규정’까지 발표했다. 사우디 정부는 최근 코로나19로 인해 어려움을 겪는 민간 기업이 최대 40%까지 직원 임금을 삭감할 수 있는 규정을 마련했다. 이로 인한 민심 이반 위험을 알지만 워낙 경기가 나빠 단행할 수밖에 없었다는 지적이 나온다.

○ 경제 정상화 시점 고민

봉쇄 조치가 길어지면서 최근 심심찮게 통금 및 이동제한 조치가 지켜지지 않는 모습도 나타나고 있다.

이집트는 라마단 시작과 함께 통금 시간을 기존 오후 8시에서 오후 9시로 1시간 늦췄다.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이마저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다. 카이로 곳곳에서 오후 9시 이후에도 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 음악을 크게 틀어놓은 채 달리는 자동차를 볼 수 있다. 한 30대 이집트 직장인은 “경찰이 단체 모임은 엄격히 통제하지만 통금 시간 이후 혼자 돌아다니는 것, 공원이나 광장에서 노는 것은 엄격하게 단속하지 않는 편”이라고 전했다.

파키스탄은 이슬람권에서 거의 유일하게 올해 라마단에도 모스크 예배를 허용했다. 심각한 경제난으로 민심 이반을 두려워한 현 정권이 종교계 강경파들의 요구에 백기를 들었다는 분석이 나온다. 파키스탄은 지난해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3년간 60억 달러(약 7조2000억 원) 규모의 구제금융을 받기로 했다. 그런데도 코로나19 등으로 경제 상황이 나빠지자 지난달 16일 13억9000만 달러의 추가 지원까지 받기로 했다.

중동 각국은 경제 정상화 시점을 놓고도 고민하고 있다. 지금처럼 철저한 봉쇄 조치를 시행해도 확진자가 계속 늘어나면 쉽사리 봉쇄 해제를 단행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봉쇄를 계속하자니 “코로나19에 걸리기 전에 먼저 굶어죽겠다”며 불만을 표하는 국민들을 외면하기도 힘들어 골머리를 앓고 있다.

사우디, 카타르 등 전제군주 체제인 나라를 포함해 중동 각국은 대부분 극소수의 인물이 장기 집권하고 있다. 평소에도 정치사회 활동에 대한 제약이 많고 국민들의 불만도 폭발 직전이다. 라마단 같은 명절에 더더욱 민심을 의식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 라마단 이후는 더 걱정

전문가들은 라마단 이후 중동 전체가 더 큰 어려움에 처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사우디와 UAE 같은 산유국은 코로나19로 대형 인프라 사업이 모조리 중단되거나 축소됐다. 저유가 타격이 심각한 국가 경제에 더 큰 타격을 안길 수밖에 없다.

중동 각국에서 완전히 방치된 외국인 노동자들의 집단 감염 우려도 높다. 이들의 열악한 주거 여건 및 위생 상태를 중동 전체에 코로나19가 대거 확산된 원인으로 꼽는 전문가들이 적지 않다. 그렇지만 어느 나라도 이들에 대한 체계적인 관리 및 지원에 나서고 있지 않다. 싱가포르 같은 선진국에서조차 외국인 노동자의 집단 감염이 심각한데 보건의료 인프라가 취약한 중동에서 이를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최근 이집트 보건장관은 “백신이 개발될 때까지 코로나19와 공존해야 한다”는 취지로 발언했다. 사실상 코로나19를 관리할 역량이 부족함을 스스로 인정했다는 반응이 나온다. 중동 전체에서 ‘코로나19와의 전쟁’이 상당 기간 이어질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이세형 카이로 특파원 turtle@donga.com
#중동 경제#코로나19 팬데믹#라마단 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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