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밀을 뿌리면 기분 좋은 일이 생긴다[포도나무 아래서]<53>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5월 12일 03시 00분


코멘트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신이현 작가 ·프랑스인 남편 도미니크 에어케(레돔) 씨
신이현 작가 ·프랑스인 남편 도미니크 에어케(레돔) 씨
“호밀이 이렇게 키가 클 줄 몰랐네. 생각지도 않게 부자가 됐어. 한 줌의 호밀을 뿌렸을 뿐인데 이렇게 숲을 이루어주다니 정말 신기해! 키가 나보다 더 크다!” 레돔은 호밀밭을 돌아다니며 감탄한다. 비가 내리자 호밀이 흠씬 더 자랐다. 작년 겨울 국립종자원에 연락해 소독하지 않은 씨앗을 주문해 뿌린 것이었다. 포도나무 밭을 만들겠다면서 호밀 씨부터 뿌리다니 무슨 짓이야? 호밀밭의 파수꾼이라도 되겠다는 건가?

“땅은 벌거벗은 걸 좋아하지 않아. 잡초라도 덮여 있어야 해. 태양이나 비는 맨땅을 공격해서 흙 속에 사는 미생물들은 다 죽여. 그러면 땅이 딱딱해지고 사막화되어 버려. 호밀을 뿌리면 좋은 일이 생길 거야.” 레돔은 대체로 맞는 말을 하기 때문에 나는 반박할 수 없어 늘 부아가 난다. 쓸데없이 일이 많아질까 봐 걱정이다. 지난겨울 밭을 갈기 위해 빌려온 관리기는 너무 낡아서 자주 시동이 꺼졌고 언덕을 내려오면서 몇 번이나 뒤집어져 다칠 뻔했다. 돌이 많은 땅이라 날이 부서지고 나사가 풀리기도 했다. 몇 시간 흙을 파헤치며 작은 나사를 찾아 헤맸다. 6611m²(약 2000평)의 땅을 갈아 씨를 뿌리느라 고생했다.

그러나 겨울에 싹이 파릇파릇 올라올 때는 신기했다. 흰 눈 속에 초록은 더욱 빛이 났다. 이웃 복숭아 농부의 개가 어린 호밀 싹을 좋아해서 산책 갈 때면 이곳에 들러 호밀을 뜯어 먹었다. 개는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면서 어린 호밀 싹을 뜯었다. 개 풀 뜯어 먹는 소리라는 속담에 해당되지 않는 개였다. 산에서 내려온 노루와 토끼도 풀을 뜯고, 멧돼지도 호밀 싹을 훑어 먹었다. 밭은 아침마다 토끼 똥, 노루 똥, 개똥, 멧돼지 발자국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이 파란 잡초들은 뭐죠? 호밀이라고요? 포도밭에 왜 호밀을 뿌렸죠?” 봄이 되어 포도나무 심기를 도우러 온 청년들이 초록 풀로 덮인 밭을 보고 놀라워했다. “이렇게 자란 호밀은 나무에 필요한 영양소인 탄소를 만든답니다. 길게 땅속으로 내린 뿌리들은 물을 가득 머금고 있어 여러 미생물과 박테리아들이 붙어 살고요. 지렁이들도 그 뿌리들 사이를 헤엄쳐 다니고 있을 겁니다. 밭에 호밀을 뿌리면 계속해서 좋은 일이 생긴답니다.” 이런 말을 하면 도시 청년들은 굉장히 신기해한다. 소독하지 않은 호밀을 구해달라고 할 때만 해도 정말 귀찮게 생각했는데 호밀이 자라는 것을 보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퍼진다. 자꾸 밭에 가고 싶은 생각이 든다. 지금쯤 호밀이 얼마나 더 자랐을까, 땅속 뿌리에 붙어 사는 박테리아와 지렁이가 궁금하고 자다가도 바람에 물결치는 그 풍경이 그리워졌다.

포도나무를 심고 나자 호밀은 더 바빠졌다. 아기를 돌보는 엄마처럼 포도나무 발치가 마르지 않도록 촉촉하게 감싸주었다. 뜨거운 뙤약볕이 내리쬐면 아빠의 밀짚모자처럼 그늘을 만들어 시원하게 숨 쉴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러나 봄비가 한 번 더 내리자 호밀은 성큼 더 자라버려 문제가 생겼다. 태양을 가려 어린 나무가 자라지 못할 정도가 됐다. 호밀을 모두 베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호밀 전문가 레돔의 생각은 달랐다.

“베지 말고 포도나무 남쪽으로 난 호밀을 모두 밟아서 눕혀줘. 뒤쪽은 그냥 둬. 북쪽에서 부는 바람이 매서우니까 북풍을 막아줄 거야.” 나는 장화를 신고 포도나무 앞쪽에 심어진 호밀을 밟아 눕히기 시작했다. 사그락사그락 소리를 내면서 호밀이 바닥에 눕는다. 어느 프랑스 시인의 시구(詩句)가 저절로 흘러나온다. 시몬, 너는 좋으냐 호밀 밟는 발자국 소리가….

남쪽으로 난 호밀을 모두 눕히니 한쪽 길이 훤해졌다. 이제 어린 포도나무는 북풍을 가려주는 뒤쪽 호밀에 기대어 햇빛을 한껏 받으며 자랄 것이다. 농사가 힘들다고 하지만 호밀이 있으면 좋은 일이 생긴다. 게으른 농부도 자꾸 밭에 가고 싶어진다. 밟아서 눕힐 때 나는 소리도 좋지만 바람이 불 때마다 물결치는 풍경은 마음을 설레게 한다. 호밀 싹을 먹고 자란 복숭아 농부의 개도 이 풍경을 보면 굉장히 듣기 좋은 소리로 멍멍 짖어댄다. 호밀 시를 읊는지도 모르겠다. 이제 한 달 후면 호밀을 수확해야 할 것 같다. 내년에 뿌릴 씨앗을 남겨두고 호밀빵 두어 개 구워 먹을 정도라도 나오면 좋겠다.

※ 프랑스인 남편 도미니크 에어케(레돔) 씨와 충북 충주에서 사과와 포도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습니다.

신이현 작가
#포도나무#포도농사#포도나무 아래서#호밀#농부#농사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