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권 직후 김정은은 활발한 현지지도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무뚝뚝했던 아버지 김정일과는 달리 청년과 여성 등 주민들을 끌어안고 웃으며 ‘애민정신’을 가진 새로운 지도자임을 홍보했다. 그렇게라도 대중의 지지를 얻어 부족한 정통성을 보완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다 얼마 후엔 군부대를 찾아 나이든 군 간부들을 옆에 불러 세우고 삿대질을 하며 고함을 치는 모습을 연출했다. 주민에겐 자상하게, 권력자들에겐 엄한 지도자의 이미지를 만들기 위한 ‘김정은 스타일’이었다.
두 유형의 현지지도엔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 ‘밀접 접촉형’이라는 것이다. 조선중앙TV를 보고 있자면 ‘김정은이 보통 사람 냄새 좀 맡았겠구먼’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주민들과 밀접하게 접촉하는 장면이 이어졌다. 방송을 통해 보는 다른 주민들이 마치 최고지도자와 대면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려는 이미지 정치였다. 방송을 보는 군 간부들이 자신도 혼쭐이 나는 느낌을 주는 목적이 있었을 것이다. 김여정과 같은 선전선동 전문가들은 ‘가까이 더 가까이’를 요구했을 것이다.
그러나 김정은이 권력을 공고화해 가면서 ‘밀접 접촉형 현지지도’가 줄어들기 시작했고 올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이후엔 완전히 사라졌다. 미국 CNN 보도로 확산된 신변 이상설을 잠재우려 급히 준비된 것으로 보이는 1일 비료공장 방문이 대표적이다. 최고지도자는 일단의 최고위 간부들의 수행을 받으며 테이프 커팅을 하고 공장 이곳저곳을 돌아다니지만 공장 근로자들과의 접촉은 일절 없다. 마스크를 쓴 근로자들은 단상 아래 줄지어 서 박수를 치는 구경꾼일 뿐이다.
장소가 확인된 공개 활동으로만 보자면 김정은은 벌써 한 달 이상 수도 평양을 비우고 있다. 지난달 11일 평양의 노동당 중앙위 본부청사에서 당 정치국 회의를 주재했다고 보도된 것이 마지막이다. 북한은 아직 코로나19 확진자가 없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김정은이 코로나를 피해 원산의 집무실에서 장기 체류하고 있다는 관측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조한범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만일 정치국 회의를 평양이 아닌 원산 집무실에서 했다면 3월 17일 평양종합병원 착공식장에 나타난 뒤 두 달 가까이 평양을 비우고 있는 셈”이라고 말했다.
접촉의 정도와 지역을 막론하고 현지지도 자체가 크게 줄었다. 국가정보원은 올해 김정은의 공개 활동이 17회로 예년의 3분의 1 수준으로 줄었다고 6일 밝혔다. 14일까지 13일 동안 공개 활동 보도가 없었다. ‘수령 결사옹위’를 생명으로 하는 북한 체제에서 김정은의 신체적 정신적 건강은 지고의 가치다. 최고지도자의 권위 때문에 마스크를 쓸 수도 없고 아예 현지지도 자체를 줄이는 것으로 분석된다.
현지지도는 김씨 3대 세습 독재가 대를 이어 구축해 온 독특한 통치행위다. 김일성 주석은 1956년 12월 11∼13일 열린 당 중앙위 전원회의에서 ‘사회주의 건설에서 혁명적 대고조를 일으키기 위하여’라는 연설을 한 후 그달 28일 강선제강소(현 천리마제강기업소)를 방문했다. 최고지도자가 현장에서 지시한 내용은 당군정의 간부들에게 공유되고 노동신문 등 매체를 통해 일반 주민들에게 알려진다. 해당 사업에는 국가의 자원이 우선 배분되고 그 성과는 지도자의 국정 수행 능력으로 다시 홍보된다.
현지지도가 줄어든다고 국정이 마비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60여 년 동안 수령이 현장에 떠야 일이 돌아가도록 길들여진 북한 체제의 특성을 감안하면 최고지도자의 리더십과 국정 능력의 약화는 불가피해 보인다. 김정은 신변 이상설은 진화됐지만 북한도 코로나19가 촉발한 ‘언택트(비대면)’ 격변에 직면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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