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눈물[왕은철의 스토리와 치유]〈141〉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5월 20일 03시 00분


어머니의 눈물을 얘기하는 신화는 많아도 아버지의 눈물을 얘기하는 신화는 그리 많지 않다.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스’ 마지막 장에 나오는 아버지의 눈물은 그래서 더 각별하게 다가온다.

트로이의 왕은 아들 헥토르가 죽자 땅에서 대굴대굴 뒹굴며 울었다. 죽어서도 묻히지 못하고 있는 아들을 위해 그렇게 울었다. 체면이고 뭐고 없었다. 아들의 시신은 말이 끄는 전차에 묶여 질질 끌려 다니고 있었다. 그리스군 장군 아킬레우스는 헥토르를 죽인 것만으로는 분이 안 풀리는지 시신을 그렇게 욕보였다. 자신의 친구가 헥토르에게 죽임을 당한 것에 대한 앙갚음이었다. 하늘의 신들도 노여워할 무지막지한 짓이었다.

헥토르의 아버지는 분노의 광기에 사로잡힌 아킬레우스를 찾아가기로 했다. 아내가 당신도 죽게 될 거라며 만류했지만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내 아들을 안고 울 수 있다면 나는 아킬레우스의 손에 죽어도 좋소.’ 그는 몸값으로 줄 금은보화를 수레에 가득 싣고 아킬레우스에게 가서 무릎을 꿇고 애원했다. ‘나를 보며 나만큼이나 늙고 무기력한 당신 아버지를 생각해보시오.’ 그는 아들을 죽인 데다 시신까지 욕보인 포악한 적군 장수 앞에서 비통하게 울었다. 그는 한 나라의 왕이기 전에 아버지였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아킬레우스가 울기 시작했다. 그는 고향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아버지를 떠올리며 울었다. 요절할 운명을 타고난 자신이 죽으면 아버지도 눈앞에 있는 노인처럼 울게 될 것이었다. 결국 그는 시신을 씻겨 기름을 바르고 옷을 입혀 내어주었다.

시신이 돌아오자 트로이는 눈물바다가 되었다. 헥토르의 어머니와 아내, 아들을 비롯하여 모두가 목 놓아 울었다. 목숨을 걸고 적장을 찾아간 아버지의 눈물이 있었기에 가능해진 애도의 눈물이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는 눈물이 어머니만이 아니라 아버지의 영역이기도 하다는 것을 아낌없이 증언한다. 사회와 문화가 아버지들의 눈물을 억압하지만, 우리의 아버지들도 운다.

왕은철 문학평론가·전북대 교수
#일리아스#헥토르#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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