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븐할둔(1332∼1406)은 14세기에 활약한 이슬람의 정치가이자 역사학자다. 조상은 예멘인이었고, 자신은 튀니지에서 태어났다. 그는 북아프리카의 이슬람 왕국과 스페인에 진출해 있던 무슬림 왕조인 그라나다 왕국에서 정치가로 활약했다. 그가 남긴 최고의 저작이 ‘역사서설’이다. 원래는 인류 문명사를 서술하려고 했는데, 너무 거대한 작업이었는지 완성하지 못했다. 그는 이슬람 지식인이었고 정통 학자 집안에서 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14세기 인물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합리적인 지성을 지니고 있었다. 고대 사회와 종교적 신화에 대한 예리한 비판은 17세기 계몽주의 지식인의 수준을 넘어선다.
이슬람국가(IS)와 같은 경직된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이 이븐할둔만큼의 지성을 지녔더라면 세상은 얼마나 나아졌을까. 역사서설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예멘에 툽바 왕조라는 작은 나라가 있었다. 기원전 6세기 페르시아 제국의 전성기에 툽바에 아사드 아부 카립이란 왕이 있었다. 그는 세 아들을 동시에 원정을 보냈다. 그중 두 아들이 이란 지역을 약탈하고 중국까지 진격했다. 이들 부하 일부는 티베트에 잔류했다. 막냇동생은 비잔틴 지역으로 진출해 이 지역을 복속시키고 돌아왔다. 예멘 사람들은 자랑스러웠던 모양이지만 이븐할둔은 일침을 가한다. 당시 전쟁에서 장거리 원정은 소위 현지 조달이라고 말하는 약탈 없이는 불가능하다. 더욱이 중국까지 진군하려면 페르시아를 포함한 그 중간의 수많은 국가를 복속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툽바가 이들 지역을 정복했다는 어떤 증거도 없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자랑스러운 역사에 취한다. 과거사인데 뭐 어떠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이런 역사에 취하는 순간 이성은 감성에 굴복하고, 지성은 약물에 중독되듯 경직되고 퇴화한다. 그러면 삶의 수많은 사안에 대해 올바른 판단과 결정을 내릴 수 있을까? 얼핏 실생활과는 아무 상관이 없어 보이지만, 감성적 역사의 진짜 해악은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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