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용산구 효창공원 근처를 지나는데 작은 가게 앞에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점심시간 무렵인 걸로 봐서 음식점인 것 같았다. 어떤 음식을 파는지 궁금해 가게 앞을 기웃거렸는데, 입구에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다. ‘지구촌에 살고 있는 어떤 사람이라도 단 한 그릇 먹어보고 눈물을 흘려 줄 음식을 내 혼신의 힘을 다하여 만들고 싶다. 21세기가 기다리고 있기에. 88년 10월 이문길.’ 자장면 한 그릇에 이런 궁극의 열정을 담아낸 음식점이라니, 궁금했다. 사명감을 갖고 자장면을 만드는 사장님이 궁금했고, 그 자장면 맛이 궁금했다. 오늘은 늦었고 내일 점심에 와야겠다.
다음 날, 평소보다 조금 이른 시간에 사무실을 나와 자장면 집으로 향했다. 이른 시간임에도 세 팀이나 기다리고 있었다. 테이블이 네 개밖에 없는 단출한 식당. 벽에는 사장님이 손글씨로 적은 메시지가 적혀 있었다. 1981년 가게를 열어 내년이면 40년이 되는 노포 중의 노포. ‘저희 가게는 다른 첨가제를 넣지 않고 밀가루와 물만으로 반죽하여 면에 힘이 없습니다’라는 글을 읽을 때쯤, 탕! 탕! 수타면을 뽑는 소리가 주방에서 들려왔다. 함께 간 동료와 자장면 하나, 간자장 하나를 주문하니 입에 침이 고이기 시작했다. 음식이 나오는 동안 식당 정보를 검색해보니 예전에는 짬뽕도 팔았는데, 사장님 연세가 많아지면서 짬뽕은 메뉴에서 지우고 지금은 자장면과 탕수육만 판다고 했다. 이윽고 우리 앞에 자장면과 간자장이 한 그릇씩 놓였고, 사장님 혼신의 힘이 담긴 간자장을 한 젓가락 먹는 순간, 슴슴한 자장맛에 충격을 받았다.
난 사실 자장면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초등학교 졸업식 날 먹었던 자장면도 그렇게 감동적이지 않았고, 수업시간에 몰래 갔던 당구장에서 시켜 먹었던 자장면도 그런 경험이 재밌어서 먹었을 뿐 자장면이 맛있어서 먹은 건 아니었다. 사회 생활하면서 몇 번의 이사를 하고 이사하는 날마다 자장면을 시켜 먹었지만 그 역시 자장면이라는 음식이 간편해서 먹었을 뿐 맛있어서 먹은 건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까지도 잊지 못하는 자장면이 있다. 어린 시절 학교 앞에 작은 분식점이 있었는데 저녁시간에만 자장면을 팔았다. 근처 고등학생 형들이 야간 자율학습을 하기 전에 얼른 와서 먹고 가라고 단돈 500원에 자장면을 팔았는데 그 자장면이 정말 맛있었다. 정식 중국집이 아니었기 때문에 양파와 몇 가지 채소를 썰어 춘장에 볶은 다음 우동 면에 자장 소스를 부어 주고 계란프라이 한 개와 채 썬 오이를 고명으로 올려준 집이었는데 자극적이지 않고, 집에서 엄마가 만들어준 자장면처럼 슴슴하니 꽤 맛있었다. 그렇게 자장면 한 그릇은 옛 기억을 소환할 정도로 맛있었고 어느새 자장면 그릇은 양념 한 점 없을 정도로 깨끗이 비워져 있었다. 주인이 자부심을 갖고 만든 자장면 한 그릇 덕분에 손님도 덩달아 ‘짜부심’이 생기다니, 혼신의 힘을 다해 만들었다는 말이 과언은 아닌 듯했다. 나는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으로서 내 일에 얼마나 혼신을 힘을 다하고 있으며, 어떤 자부심을 갖고 일하고 있는가. 음식의 본질이 맛과 정성이라면 내 일의 본질은 무엇인가, 자장면 한 그릇 덕분에 맛있는 고민을 하게 됐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