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르기만 해도 안 돼, 맛만 있어도 안 돼![오늘과 내일/허진석]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6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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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로 인해 소비자 선호 변화
안전한 배송과 저장성 좋은 식품 부각

허진석 산업2부장
허진석 산업2부장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예전에는 눈여겨보지 않던 가치들이 새롭게 부각되곤 한다. ‘감염 걱정 없는 배송’과 ‘저장성 좋은 식품’도 그에 포함될 것 같다.

쿠팡의 ‘세계’에 있던 소비자는 요즘 불편하다. 쿠팡 부천 물류센터에서 코로나19 확진자가 나오면서 ‘구매하기’ 단추를 누르기가 주저되기 때문이다. “쿠팡에서 주문해도 될까요”라고 묻는 말들이 주변에서 자주 들린다. 택배 상자를 통한 감염 사례는 아직 보고되지 않았지만 집에서 생필품을 배송받는 경우가 많아 소비자가 느끼는 불안감이 더 크기 때문이다.

케첩 하나를 시키면서 시작된 익일 배송의 세계는 놀라움과 미안함이 교차하는 경험이었다. 3000원을 갓 넘기는 케첩 하나를 시켜도 무료로 다음 날 가져다주니 그랬다. 화장지 걸이를 교체하는 것 같은 집안일을 해야 할 때면 저녁에 주문해서 다음 날 아침에 바로 교체할 수 있기에 절약되는 시간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학용품도 저녁에 시키면 다음 날 아이가 눈뜨기 전에 머리맡에 둘 수 있을 정도다.

이는 다른 유통기업에도 자극이 돼 롯데마트는 2시간 내 배송을 시작하는 등 더 많은 기업이 ‘빠른 배송’에 참여하고 있다. 유통 인프라는 더 튼튼해지고, 소비자의 편익은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 쿠팡발 확진자 확대 사태로 빠른 배송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을 소비자들은 알게 됐다. 확진자 발생 초기에 쿠팡이 보여준 대응은 ‘로켓배송’을 앞세워 혁신의 아이콘이 되고자 하는 평소 모습과는 거리가 있었다. 회사가 소비자에게 적극적인 안내를 하지 않아 배송 직원들이 애먼 고생을 더 했다는 얘기도 들린다. 방역 전문가들이 예견하듯이 코로나19 같은 감염병은 언제든 다시 발생할 수 있다. 방역이 철저하지 않은 배송체계를 갖춘 기업은 언제든 소비자의 신뢰를 잃을 수 있는 것이다. 쿠팡 같은 기업들은 물류센터는 물론이고 배송 과정 전체의 방역을 더 철저히 해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됐다.

식품산업에서는 저장성이 새삼 화두가 되고 있다. 먹을 것이 넘쳐나던 시대에 저장성이 좋은 식품은 맛이나 신선도가 떨어지는 식품으로 취급됐지만 그 위상이 달라진 것이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라면과 냉동식품을 만드는 회사의 매출은 당초 우려와 달리 오히려 늘었다. ‘짜파구리’를 만드는 농심은 세계 곳곳에서 주문이 들어오면서 공급량이 달릴 정도였다. 국내에서도 비상사태에 대비해 라면을 좀 더 사다 두는 가정이 늘면서 라면의 위상은 올라갔다. 하지만 요구르트나 식빵 같은 저장 기간이 길지 않은 식품의 비중이 큰 기업들은 매출 하락을 피할 길이 없었다.

이 때문에 식품기업들은 저장성이 좋은 가정간편식(HMR) 사업 비중을 이번 기회에 크게 늘리고 있다. 편의성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늘어나던 HMR 품목이 더 많아지면서 곤드레밥과 같은 특별한 메뉴도 언제든 간편하게 먹을 수 있게 됐다. 감염병 사태가 언제든 재발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식품기업의 최고경영자(CEO)라면 저장성도 좋고 맛도 있는 식품으로 사업을 늘리기 위한 고심이 클 것 같다.

제때에 소비해야 가치가 있는 농수산물의 저장성을 늘리는 방안을 강구할 필요성도 커졌다. 꽃이나 횟감이 제때 소비되지 못해 많은 농민과 어민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

코로나19 사태가 한국에서는 진정되고 있지만 소비자들이 새롭게 보기 시작한 가치는 산업의 새로운 기준이 될 공산이 크다. 지금은 비록 미미해 보일지 모르지만 ‘감염 걱정 없는 빠른 배송’과 ‘저장성도 좋고 맛도 좋은 식품’은 새로운 기회가 될 것으로 보인다.

허진석 산업2부장 jameshuh@donga.com


#코로나19#배송#유통#식품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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