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분석을 간단하게 정의한다면? 정신(마음)의 분석입니다. 그렇다면 정신이 중요할까요, 분석이 중요할까요? 정신이 본(本)이고 분석이 말(末)입니다. 정신이 근본이고 분석은 지엽(枝葉)입니다. 정신분석의 이름을 걸고 본과 말을 뒤집고, 근본과 지엽을 뒤바꾸면 정신분석이 아닙니다. 상투적인 질문과 해석으로 마음을 헤집어 놓으면 분석이 아니고 분열입니다. 분석은 마음을 조각내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조각난 것들을 연결, 봉합하기 위한 것입니다.
인권운동의 본과 말은 무엇일까요? 인권인가요, 운동인가요? 운동이 인권을 뒤집으면 이미 인권운동이 아닙니다. 분석의 이름으로 정신을 뒤집어버린 사람이 정신분석가가 아닌 것처럼, 운동의 이름으로 인권을 뒤집어버렸다면 그 사람 역시 인권운동가는 아닌 겁니다.
정신분석은 분석을 받는 사람(피분석자)과 정신분석가, 단 두 사람이 닫힌 공간에서 오랜 시간, 되풀이해서, 여러 해 동안 하는 작업입니다. 평등한 관계지만 모든 것이 항상 평등하게 이뤄지지는 않습니다. 내밀한 이야기를 털어놓은 피분석자의 마음에 분석가는 어린 시절 생존을 걸었던 엄마처럼 큰 존재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이를 전이(轉移)라고 합니다. 어릴 때 경험이 현재로 옮겨온 것이지요. 엄격한 아빠, 또는 사랑해야 할 대상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전이 현상은 분석에서 흔히 나타나고 중요하지만 분석가가 피분석자와 적절한 거리를 지키지 못하면 위험을 초래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분석가를 수련, 인증, 심의하는 프로그램이 엄격하게 집행됩니다.
인권운동은 자신의 권리를 침해받아 몸과 마음의 상처를 입은 사람을 보듬는 사회운동입니다. 몸의 상처는 흉터가 남아도 치유되지만, 피해자 마음의 상처는 평생을 갑니다. 마음에서 흘리는 피는 다른 무엇도 아닌 사람의 마음으로 치유해야 합니다. 그래서 피해자는 지옥 같았던 고통을 털어내려고 어린 시절 엄마와 같이 안아 줄 사람을 찾으려고 합니다.
냉정하게 보면 안기려는 피해자와 안으려는 인권운동가 사이의 관계는 시작부터 수평적이지 않습니다. 보듬어 줄 사람을 냉정하게 보기는 어렵습니다. 어떤 운동이든 사회와 언론의 관심, 사람, 돈이 모이면 권력이 됩니다. 권력욕에서 논점을 만들고, 사회적 관심을 끌고, 사람과 돈을 의도적으로 모으는 일도 있습니다. 권력이 무조건 경계의 대상은 아닙니다.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제대로 잘 쓰면 사회적 선(善)이 됩니다. 권력 자체가 목적이 되고 사적 이익을 위해 누린다면 사회적 악(惡)이 됩니다.
피분석자의 마음을 무시한 일방적인 분석이 정신분석 과정을 저해하는 것처럼 인권 피해자의 마음을 무시한 일방적인 운동은 인권운동의 본질을 잠식하고 파괴합니다. 정신분석이든, 인권운동이든 오랜 세월 서서히 진행되므로 정신분석가는 타성에 빠지고 인권운동가는 오만에 빠지기 쉽습니다. 오래 해왔다고 반드시 정당한 것은 아닙니다.
피분석자의 마음을 무시하고 막 다룬다면 그 ‘분석’은 피분석자의 마음에 상처를 남기는 길로 들어선 겁니다. 인권운동가가 인권 피해자의 마음을 배려하지 않고 ‘운동’에만 치중했다면 마음의 상처에 소금을 뿌린 겁니다. 무시와 무관심으로 가는 길은 기름 바르고 닦아서 보기 좋게 번쩍이지만 한번 들어서면 돌아설 수 없는 미끄럼판과 같습니다.
피분석자와 거리를 못 지키고, 경계를 침범한 정신분석가에게는 외부 전문가들이 개입해서 상황을 점검하고 정리합니다.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고, 해결할 능력도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정도에 따라 자격이 박탈되기도 합니다. 사회의 칭송을 받았던 인권운동도 상식과 원칙의 틀에서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방심한 상태에서 스스로 외부 개입의 정당성을 불러온 겁니다. 이미 미끄럼틀에서 내려왔으면 다시 올라가거나 접어야 합니다. 어떤 선택도 어렵습니다.
마음의 상처는 오래갑니다. 열려 있는 상처는 더욱 그러하고, 대개 사람에게 입은 상처입니다. 그런 경험이 있으면서 정신분석가든, 인권운동가든, 다른 사람에게 다시 마음을 열었다면 정말 어려운 걸음을 한 겁니다. 상처가 도질 것을 항상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망설이다 겨우 맺은 관계에는 함정이 있습니다. 새로운 관계가 끊어질까 두려워서 웬만한 일은 참아야 합니다. 그러다 견딜 수 없으면 분노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분노의 목소리를 우리는 들어야 합니다. 그것이 개개인의 인간다움이고 사회와 국가의 책무입니다.
자기편의 일은 소중한 일이고, 자기편에 대항하는 불편한 사람의 일은 아무렇게나 떠들어도 된다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마음에서 아직도 피 흘리며 사는 인권 피해자에게 그렇게 쉽게, 아무 말이나 뱉어낸다면 자신이 인간다운 인간이 아니라는 고백을 한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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