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장 북한과 무엇을 하려는 것도 아니다. 남북교류협력법이 제정된 지 30년이 된 만큼 변화된 상황을 반영해 보자는 것이다.”
통일부가 추진하는 남북교류협력법 개정 논란에 대해 한 당국자는 이렇게 말했다. 고위 당국자는 “30년 전 제정 당시에는 상상하지 못할 만큼 많은 교류와 협력사업이 추진됐다”며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어야 할 상황을 맞이했다”고도 했다.
정부의 이런 개정 필요성에 공감이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현행법엔 방북 승인을 거부하는 구체적 근거 조항이 없어 통일부 장관이 ‘자의적 재량’으로 승인 거부를 해왔다. 대북 민원인의 불만이 생길 수밖에 없는 부분이다. 이에 정부는 2년 이상의 형에 기소된 사람 등 구체적인 방북 승인 거부 대상을 개정안에 포함시켰다.
문제는 이번 교류협력법 개정안이 그동안 법규상 미비했던 점을 보완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특히 개정안에는 북한 기업이 한국 시장에 진출해 영리 추구뿐만 아니라 부동산, 주식 등에도 접근할 수 있는 근거 조항이 들어가 있다. 당장 “비핵화도 안 했는데 북한에 우리 시장을 개방하겠다는 것이냐”란 비판도 뜨겁다.
논란이 일자 통일부는 “해당 사안이 이미 규정으로 고시된 상태로, 상향 입법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입장이다. “고시도 법적 효력이 있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그러나 논란을 감수하면서도 새로 개정안에 넣는 배경에 대한 설명은 부족해 보인다.
교류협력법은 남북 경협 사업자, 대북 인도주의 단체 등이 1차적인 관련 대상이다. 그러나 이번 개정안에는 경협뿐만 아니라 공연, 방송, 음반 등 문화사업 시장을 북한에 개방하는 내용까지 담아 향후 우리 사회 전반에 미치는 영향이 작지 않을 수 있다. 해당 법안은 이미 공청회를 마쳤고, 통일부의 입안을 앞두고 있다. 개정안과 관련해 논란이 적지 않은 상황에서도 정부는 국민을 향한 이해와 설득에 집중하기보다는 “기존 규정을 상향 입법한 것”이라며 의미를 축소하는 데 무게를 두는 모습이다.
○ 비핵화 이후 적용 가능할 교류협력법 개정안
무엇보다 이번 개정안에는 남북 상호주의를 명시적으로 보장하는 성격이 구체화됐다. 남북 경협 활동 등을 정의한 ‘경제협력사업’(제18조의 3)이 법에 포함되며 ‘남한과 북한의 주민이 경제적 이익을 주된 목적으로 상대방 지역에서 이윤 추구를 할 수 있다’는 것이 명문화된 것. 한국 기업이 북에 가서 기업 활동을 하는 것뿐만 아니라 북한 기업이 한국에서 경제 활동을 하는 것을 보장하는 근거를 담은 것이다.
구체적인 허용 범위로는 △상대방 지역이나 제3국에서 공동 투자 및 결과에 따른 이윤 분배 △증권 및 채권 △토지, 건물 △산업재산권, 저작권 등 지식재산권 △광업권, 어업권, 전기·열·수자원 등 에너지 개발·사용권 등이 포함됐다. 즉, 북한의 기업이 삼성 주식을 사고, 서울 강남 아파트를 구입하는 것도 원칙적으로 가능해지는 셈이다.
북한 기업이 한국에서 한국인 노동자를 고용할 수도 있다. 북한 문화기업이나 예술인이 한국에 와서 활동할 수 있는 ‘사회문화협력사업’(제18조의 4) 조항도 새로 들어갔다. 학술, 음악, 공연, 영화, 음반, 방송 등 문화사업 대부분을 북에 개방하는 근거가 법에 마련됐다.
그러나 이런 정부의 파격적인 대북 메시지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마냥 달갑게 보지만은 않을 것 같다. 1인 독재 체제를 지키기 위해 주민의 이동 제한뿐만 아니라 정보 접근도 막는 북한 당국이 한국에 노동자나 예술가를 자유롭게 보내기가 현재로서는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이번 개정안의 일부 사항은 북한이 비핵화를 해 유엔 제재가 해제되고, 전면 개방 수준의 개혁 정책을 펼친 후에야 적용 가능한 ‘이상적 미래 법안’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김병연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정부 개정안은 중국이나 베트남의 개혁 개방 정도를 넘어서고 있다. 북한이 이를 넘어서는 개혁적인 개방 카드를 꺼냈을 때 실현 가능할 것 같다”고 말했다.
○ 경협 대폭 지원하지만 이적 행위도 감시
남북 경협의 시작은 198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노태우 대통령이 북한 정책을 전향적으로 전환하기로 한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특별선언’(7·7선언)을 한 그해 김우중 대우 회장(1936∼2019)이 홍콩 중개상을 통해 북한 도자기 519점을 들여온 것이 정부의 승인을 받은 것. 교류협력법은 남북 경협 등을 지원하기 위해 1990년 제정됐다.
정부는 이번 개정안을 추진하면서 경협 사업자들에 대한 지원도 대폭 강화했다. ‘경협 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겠다는 것. 대표적으로 경협 사업자들이 사업상 북한과 접촉하는 것을 승인제가 아닌 신고제로 바꿨다. 그마저도 부득이한 경우 사후 신고해도 된다. 정부 눈치 보지 말고 다양한 사업 아이템을 만들어 보라는 것이다.
기존 교류협력법에는 북한 사람과 접촉하면 모두 신고해야 하고, 어기면 최대 300만 원의 과태료를 부과하는 규정이 있었지만 이번에 신고 의무 대상도 대폭 줄었다. 북한 방문이나 물품 반출입, 북한 주민이 참가하는 국제행사 참석이나 기타 교류협력 목적 등으로 접촉 신고 대상을 제한한 것. 일부에서는 이번 개정안을 통해 북한 식당 방문과 관련한 신고 의무가 없어졌다는 보도도 나왔지만 이는 사실과 좀 차이가 있기도 하다. 통일부 당국자는 “북한 식당 방문은 기존 법률엔 신고 대상으로 돼 있지만 단순 접촉이고 일회성 성격이 강해 ‘신고가 필요치 않다’는 법률적 해석을 이미 해왔다”고 했다. 비슷한 예로 탈북민이나 이산가족이 북한 내 가족과 연락하거나, 연구 및 취재 목적으로 북한 내 소식통과 연락하는 행위도 신고가 필요치 않다고 해석해 왔다.
이 외에도 ‘우수 교역업체 인증제’를 마련해 각종 행정 지원을 늘린다. 우수 교역업체에 선정되면 북한 방문, 반출입과 관련된 제출 서류가 간소화되며 남북협력기금을 우선 지원할 수 있다. 한국 사업자가 평양 등 북한 지역에서 사무소도 개설할 수 있다. 북한 사무소는 한국 본사와 수시로 연락할 수 있으며 북한 지역의 시장 조사, 연구 활동 등에도 나설 수 있다. 이를테면 삼성, SK 등 대기업이 북한 사업의 교두보를 직접 설치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개정 교류협력법을 통해 이렇게 동시다발적인 남북 접촉이 촉진되면서 대북 경계망에 구멍이 생길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이와 관련해 통일부는 정보 등 관계기관과 협의해 북한에 설치된 사무소의 설치 승인을 취소할 수 있다는 조항도 법에 뒀다. 기업 활동을 보장하지만 이적 행위 여부도 함께 살펴보겠다는 것이다.
○ 정부 대북 드라이브, 깊어지는 우려
정부도 ‘북한 기업에 대한 한국 시장 개방’과 같은 개정안 내용이 당장 현실화할 가능성은 희박한 것으로 보고 있다. 대북 합작 등을 금지하고 있는 유엔 대북 제재(2375호)를 비롯해 국제사회 제재와 충돌되는 부분이 한두 가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한 대북 전문가는 “정부가 북한에 한국 시장을 여는 것을 추진한다는 개정안 부분을 읽다가 그냥 자료를 덮어 버렸다. 한마디로 당장 현실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정부가 5·24조치의 사실상 폐기에 이어 교류협력법 개정에 박차를 가하는 것은 “북-미 대화만 바라보지 말고 남북 간에 할 일은 해나가자”는 기조의 연장선이다. 이는 지난해 2월 북-미의 하노이 협상 결렬 이후 1년 넘게 비핵화 협상이 진척을 보지 못하고, 이에 따라 남북 교류도 꽁꽁 얼어붙은 상황에서 대화 모멘텀을 확보하기 위한 움직임으로 보인다. 11월 미국 대선이 예정돼 있고, 한국의 2022년 대선 일정이 사실상 내년 상반기에 본격화하는 것을 감안하면 문재인 정부가 남북 협력에 드라이브를 걸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현실적 판단도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미 국무부는 교류협력법 개정안에 대해 “모든 유엔 회원국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에 따른 의무를 지키고 유엔 제재를 충실하고도 강하게 이행할 것을 지속적으로 촉구한다”고 강조했다. 한국에 제재 이탈 움직임을 보이지 말라는 경고로도 읽힌다. 정부는 법 개정 등 우리가 할 수 있는 방안을 추진한다지만 다른 나라도 아닌 한국이 대북 제재 완화 움직임을 보이는 것은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제재 공조에 틈을 벌릴 수 있다. 이런 까닭에 자칫 북한의 호응도 못 이끌어내고, 한미 동맹의 간극만 벌어지는 난처한 상황이 올 수 있다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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