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판 뉴딜이 마지막 기회라면[오늘과 내일/고기정]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6월 8일 03시 00분


수십조 국가 프로젝트 앞으론 어려울 수도
재정 허투루 안 쓰고 성과 내는 절박함 필요

고기정 경제부장
고기정 경제부장
이명박 정부 때도 ‘뉴딜’이 있었다. 2009년 발표한 ‘녹색 뉴딜’은 4년간 50조 원을 투입해 4대강 정비, 고속철도 조기 개통, 친환경차 보급 확대, 여의도 면적 1400배에 이르는 숲 조성 계획 등으로 이뤄졌다.

대규모 재정사업은 국민을 설득할 명분을 수반하기 마련이다. 과거엔 ‘소득 ○만 달러 시대 조기 개막’을 목표치로 제시하곤 했지만 요즘은 일자리 개수를 내건다. 녹색 뉴딜을 통해 새로 만들겠다던 일자리는 4년간 96만 개. 그런데 그 4년간 한국의 실제 취업자 증가 폭은 누적으로 118만 명이었다. 녹색 뉴딜이 일자리 증가분 10개 중 8개를 채운 게 아니라는 건 굳이 시비를 가릴 필요가 없어 보인다.

지난주 정부는 ‘한국판 뉴딜’의 청사진을 제시했다. 2025년까지 76조 원을 투입해 ‘디지털 뉴딜’과 ‘그린 뉴딜’을 추진한다는 소식이다. 특히 현 정부 임기인 2022년까지 31조 원 넘게 쏟아부어 2년 안에 일자리 55만 개를 만들겠다고 했다. 현재 우리 경제의 실력으로 만들 수 있는 새 일자리는 1년에 잘하면 30만 개 정도다. 정부 계획대로라면 한국판 뉴딜 일자리 55만 개를 더해 앞으로 2년간 연간 신규 취업자 수가 50만 명을 웃도는 호황이 펼쳐진다. 2000년 이후 연간 단위로 신규 일자리가 50만 개 넘게 늘어난 적은 3번(2000년, 2002년, 2014년)뿐이었다.

그럼 일자리 목표치는 어떻게 나왔을까. 정부는 매번 구체적인 근거나 산식을 내놓지 않지만, 연구용역을 맡은 전문가들 말을 빌리자면 대개 책정된 예산을 평균 노임으로 나누는 식이다. 여기에 약간의 ‘의욕치’가 더해진다. 이명박 정부의 녹색 뉴딜 예산을 일자리 목표치로 나눠 보면 일자리 한 개에 해당하는 돈은 약 520만 원이었다. 같은 식으로 현 정부가 한국판 뉴딜에 2년간 투입하는 돈을 신규 일자리 목표치와 비교해 보면 569만 원이 나온다. 그동안의 물가와 임금 상승률을 감안하면 큰 차이가 느껴지지 않는 수준이다.

뭔가 대단한 분석과 계획이 있을 것 같지만 정부의 재정사업과 성과목표라는 게 알고 보면 이처럼 허망하다. 그래도 아직 실망할 필요는 없다. 현 정부가 노인 일자리를 수십만 개씩 만들어 내 전체 실업률을 붙잡아 놓고 있는 것을 보면 적어도 수치상으로는 목표에 근접할 가능성도 있다. 문제는 내용이다. 다음 달 세부안이 나와 봐야 알겠지만 현재로선 디지털 뉴딜이나 그린 뉴딜 모두 그동안 정부나 시장이 해왔던 사업과 뭐가 다른지 차별성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이명박 정부 때 녹색 뉴딜의 초점은 임기 마지막 해인 2012년에 맞춰져 있었다. 정권이 바뀌면 사업이 좌초될 수 있다는 조바심도 있었겠으나 당시 청와대에선 차기 대선과 사업을 결부 짓는 기류도 강했다. 당장은 4대강 사업에 부정적인 여론이 많지만 전국을 연결한 자전거 도로가 개통하면 평가가 바뀔 것이고, 대선에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라는 기대였다. 지금 정부도 차기 대선까지 성과를 내놓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하려 할 것이다. 앞으로 2년간 방출할 31조 원이 오롯이 경제 토대를 든든히 다지는 데 쓰이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느낌이 드는 게 이 때문이다.

어쩌면 국가가 수십조 원짜리 메가 프로젝트를 벌이는 게 이번이 마지막일 수 있다. 성장률은 둔화하는데 재정 여건은 빠르게 악화되고 있고 저출산 고령화는 예상보다 일찍 현실이 되고 있어서다. 그래서 이번 재정사업은 과거와 같은 식이어선 안 된다. 이런 절박함이 정부 내에 있었으면 한다.

고기정 경제부장 koh@donga.com
#뉴딜#녹색 뉴딜#마지막 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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