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겨울부터 옷을 안 샀다. 요즘 대세는 옷을 안 사는 거라 들었기 때문이다. 사고 버리고 사고 버리는 패스트패션이 환경오염의 주범이기도 했고,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회색 티만 고집한다는 마크 저커버그 같은 슈퍼리치 일화가 퍼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촬영하면서 모델들이 멋진 옷으로 휙휙 갈아입는 걸 보니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래, 32세 여름은 한 번밖에 오질 않지. 나도 저런 멋진 옷 입어보자.’ 동학개미운동으로 오른 주식을 팔아 그 돈으로 옷과 신발을 샀다. 하지만 집에 오니 쇼윈도를 보며 느꼈던 자신감이 사라졌다. ‘끈 민소매가 조금 민망한 것 같기도 하고, 너무 공주님 같나?’ 객관적인 조언이 필요해 고향 친구들에게 물었다. “내 오늘 이거 샀는데 밖에 나가 입을 수 있을 것 같나?” 돌아오는 반응은 처참했다. “니가 산 거가? 마, 돈 아끼라.”
아니, 좀 난해하긴 해도 나랑 잘 어울리는 것 같은데, 라고 속으로 생각했지만 다수의 의견이 그렇다 하니 소심해졌다. 그래 내가 모델도 아닌데, 무슨 이런 옷을 입는다고. 다음 날, 환불하러 갔다가 다시 돌아왔다. 잡지사 기자 친구의 한마디 때문이다. “예쁜데? 눈치 보지 말고 입어. 옷은 너 행복하면 돼.” 조롱으로 일관하던 친구들도, 그냥 입기로 했다고 하자 돌변했다. “멋진 새키”, “마! 그래! 입어뿌라!” 그러더니 하나둘 고백하기 시작했다. 사실 나도 밖에 입고 나갈 용기가 없어서 못 입은 새 옷 많다고. 누구는 되레 제안했다. “우리 각자 제일 튀는 옷 입고 만날래? 숨어있는 옷 입고 만나는 날 정하자!” 재밌는 건 이 똑같은 말을 여러 카톡방에서 들었다는 거다. 우리 모두 남 눈치 엄청 보고 살고 있구나.
그런 의미에서 ‘퀸 와사비’의 등장은 무채색이던 내 삶에 한 줄기 빛이 되어주었다. 평생 긴 머리만 고집하다 쇼트커트 할까 단발 할까 고민하고 있는데 옆에서 삭발하는 여자를 발견한 느낌이랄까. 며칠 전 아는 동생이 이 영상 봤냐며 휴대전화를 들이밀었다. 고추냉이 색으로 머리를 염색한 여성이 망사스타킹을 신고 가슴을 드러낸 채 엉덩이를 흔들고 있었다. 엠넷에서 방영 중인 ‘굿걸’이라는 힙합 리얼리티 쇼의 한 장면이었다. ‘안녕, 쟈기?’라는 곡은 충격 그 자체였다.
“그런데 언니, 이거 한번 보면 자꾸 생각난다? 1일 1깡 하며 놀던 사람들 다 여기로 왔어. 이젠 1일 1와사비야.” ‘와, 엄마한테 등짝 맞을 것 같은데.’ 전형적으로 성적 대상화된 여성의 차림새. 그런데 이상하게 불편하지가 않다. 심지어 그녀의 무대를 보고 있노라면 해방감이 느껴진다.
“그런데 나 이분이랑 수업 같이 들었다?” 알고 보니 그녀는 대학 교육공학과를 나와 도덕 선생님으로 교생 실습까지 한 사범대생이란다. 성인용품점에서 아르바이트하고 남는 시간에 가사 써서 트월킹(성적으로 자극적인 춤)하는 힙합신의 새로운 캐릭터. 혹자는 ‘페미니즘에서 섹시가 말이 되냐, 백래시(변화에 대한 반발) 아니냐’ 하지만, 중요한 건 퀸 와사비가 대중문화에 등장함으로써 나를 더 자유롭게 만들어줬다는 거다. 박막례 선생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왜 남한테 장단을 맞추려고 하나. 북 치고 장구 치고 니 하고 싶은 대로 치다 보면 그 장단에 맞추고 싶은 사람들이 와서 춤추는 거여.” 문득 나는 어떤 춤을 추고 있나 궁금해진다. 일단 오늘은 ‘안녕, 쟈기? 렛미쉑댓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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