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코로나’ 준비하다 된서리 맞은 중동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6월 11일 03시 00분


[글로벌 현장을 가다]
성급한 봉쇄 완화로 확진자 급증… 부족한 감염병 관리 확산세 부추겨
저유가로 산유국 정상 리더십 약화
경기침체 길어지면 타격 확산

지난달 말부터 봉쇄 완화를 시작한 사우디에선 최근 신규 확진자가 급증하고 있다. 6일부터 다시 통행금지와 모스크 폐쇄에 들어간 사우디 제 2의 도시 지다의 임시병원에서 의료진이 검사 장비를 다루고 있다. 사진 출처 SPA통신
지난달 말부터 봉쇄 완화를 시작한 사우디에선 최근 신규 확진자가 급증하고 있다. 6일부터 다시 통행금지와 모스크 폐쇄에 들어간 사우디 제 2의 도시 지다의 임시병원에서 의료진이 검사 장비를 다루고 있다. 사진 출처 SPA통신
이세형 카이로 특파원
이세형 카이로 특파원
9일 오후 5시(현지 시간) 이집트 수도 카이로 도심의 엘모한데신 지역은 한산했다. 거리의 카페와 식당 문은 대부분 굳게 닫혀 있었다. 내부 공사를 하느라 테이블과 의자를 한쪽에 쌓아둔 가게도 있었다. 한눈에도 한동안 영업을 하지 않기로 계획을 세운 것처럼 보였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가 발생한 뒤에도 대부분의 현지 식당과 카페에서 포장과 배달 판매는 적극적으로 하는 것과 크게 다른 모습이었다.

엘모한데신 지역은 카이로의 상징인 타흐리르 광장과 국립박물관으로부터 차로 15분 정도 떨어져 있다. 이곳은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UAE), 쿠웨이트 같은 걸프 지역 산유국에서 유명해지고 있다. 보수적인 걸프 국가의 20, 30대들이 ‘자유’를 즐기기 위해 이집트에 오면 엘모한데신 지역을 ‘베이스캠프’로 삼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평소 이곳의 카페, 식당, 클럽은 물론이고 인근의 외국인용 임대아파트는 걸프 국가에서 온 20, 30대들로 붐빈다. 이들 중 다수는 물가가 저렴한 데다 언어가 통하는 이집트에 장기간 머물며 술, 춤, 자유로운 복장을 즐긴다.

하지만 코로나19 확산을 막기 위해 이집트와 주요 산유국이 국제선 운항을 중단하고, 입·출국을 대폭 제한하면서 엘모한데신 상권은 큰 타격을 받고 있다. 이 지역의 유명한 시리아 식당인 ‘아부 아마르’에서 샤와르마(중동식 샌드위치)를 포장하던 종업원은 “요즘 경기가 어떠냐”는 질문에 한숨부터 쉬었다.

“코로나19가 종식되고 다시 걸프 국가에서 관광객이 몰려와야 사정이 나아질 것이다. 그러나 최근 방역 기준을 완화한 뒤 사우디에서 나타나는 상황을 보면 걸프 국가의 관광객들로 다시 이 거리가 붐비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다.”

○ 봉쇄 완화 사우디 성적표 ‘처참’
사우디아라비아 등 걸프지역 산유국 젊은이들이 이집트 관광 때 즐겨 찾는 카이로의 엘모한데신지역에선 코로나19 사태 뒤 관광객이 끊겨 식당, 카페, 클럽들이 폐업하거나 장기 휴무에 돌입했다. 카이로=이세형 특파원
사우디아라비아 등 걸프지역 산유국 젊은이들이 이집트 관광 때 즐겨 찾는 카이로의 엘모한데신지역에선 코로나19 사태 뒤 관광객이 끊겨 식당, 카페, 클럽들이 폐업하거나 장기 휴무에 돌입했다. 카이로=이세형 특파원
이집트를 포함한 아랍권 국가들은 최근 지역 중심 국가인 사우디를 주목하고 있다. 지난달 말부터 사우디가 본격적으로 코로나19 관련 봉쇄 조치 완화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사우디는 이웃 이란에서 코로나19가 확산되기 시작한 3월부터 △국제선 운항 금지 △주요 도시 24시간 통금 △일부 확산지역 전면 봉쇄 △모스크 폐쇄 등 강력한 봉쇄 정책을 시행했다. 그리고 ‘라마단’(이슬람 금식성월·올해는 4월 24일∼5월 23일)을 계기로 서서히 봉쇄를 완화하기 시작했고, 지난달 말부터는 △메카를 제외한 전 지역 이동제한령 해제 △모스크 예배 허용 △국내선 운항 재개 △직장 출근 허용 등을 시행했다.

이후 다른 아랍 국가에서는 사우디처럼 서서히 봉쇄 완화에 들어갈 것이란 관측이 나왔다. 이집트에선 “정부가 사우디의 봉쇄 정책 완화를 참고해 봉쇄 수준을 결정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하지만 봉쇄 조치 완화 이후 사우디가 받아든 성적표는 처참하다. 이달 6일부터 9일까지 매일 신규 확진자 수 3000명 이상을 기록했다. 전체 코로나19 감염자 수도 10만 명을 넘어섰다. 오랜 봉쇄 조치로 경기가 침체되고 국민 불만이 쌓이자 봉쇄를 푼 것으로 보이지만, 결과적으로 성급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결국 사우디는 다시 규제를 강화하고 있다. 사우디 정부는 제2의 도시인 남동부 항구도시 지다 지역에 대해 6일부터 2주간 통행금지와 모스크 폐쇄 같은 봉쇄 조치를 재개했다. 사우디 보건부는 “감염 상황이 심각해지면 수도 리야드를 포함해 다른 지역에서도 봉쇄 조치를 다시 취할 수 있다”고 밝혔다.

중동 내에서 보건의료 수준이 높은 나라로 평가받는 UAE는 최근 아부다비, 두바이, 샤르자의 국제공항 3곳에서 경유와 환승을 허용하기로 했다. 국제선 운항 재개도 검토 중이다. 하지만 나라 안팎에선 코로나19의 재확산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크다. 일일 신규 확진자 수도 여전히 500∼600명대를 기록 중이다.

보건장관이 ‘코로나19와의 공존이 불가피할 수 있다’고 언급한 이집트도 지난달 28일부터 매일 1000∼1500명의 감염자가 발생하고 있다. 국제통계사이트인 월드오미터에 따르면 100만 명당 검사 건수가 1321건에 불과할 정도로 검사 빈도가 떨어져 실제 확진자 수는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 집단감염 주범, 외국인 노동자 숙소
사우디 등 산유국의 확산세가 심각한 주요 원인으로는 외국인 노동자 관리 실패가 꼽힌다. 대부분 산유국은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스리랑카, 필리핀 등에서 외국인 노동자를 고용해 건설, 환경미화, 단순 서비스업 등 일을 맡긴다. 이들은 보통 월 수백 달러 수준의 임금을 받으며 환경이 열악한 집단거주 시설에서 생활한다. 집단감염이 이뤄지기 쉬운 여건인 것이다. 걸프 산유국에서 근무하는 한 기업인은 “외국인 노동자 숙소 중에서도 규모가 큰 곳은 어느 정도 관리가 이뤄지고 있지만 소규모 숙소는 방치된 곳이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국민들의 안이한 위기의식도 확산세를 부추기고 있다. 감염자가 급증하며 지금은 대부분 국가가 마스크 착용 관련 규정을 마련했지만 3, 4월까지는 마스크를 하지 않는 사람이 많았다. 이집트에서는 4월 압둘팟타흐 시시 대통령이 카이로의 공사장을 지나가다 마스크를 쓰지 않은 채 일하는 노동자들을 보고 직접 현장 관리자들을 불러 “왜 노동자들이 마스크를 안 썼느냐”고 강하게 질책했을 정도다. 각종 모임이 활발히 이뤄지는 등 사회적 거리 두기도 여전히 지켜지지 않는 분위기다.

코로나19 사태가 장기화되면 안정적이었던 산유국 정상들의 리더십이 약해질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글로벌 경기 위축과 수요 감소로 저유가 기조가 이어지면 산유국의 재정수입도 하락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산유국들의 복지가 축소되고, 개발 프로젝트도 지연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사우디의 경우 재정 부담을 줄이기 위해 지난달 초 부가가치세를 5%에서 15%로 높이기로 했다. 공무원 생활보조금도 대폭 줄이기로 했다. 이로 인해 국민들의 불만은 커지는 분위기다.

중동 외교 소식통은 “사우디를 중심으로 걸프 산유국들은 왕실의 리더십을 강화하고 국민 불만을 해소해야 할 필요성이 있을 때마다 대규모 보조금을 지급했다. 하지만 저유가 상황에서는 이런 여력도 약해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 코로나19로 비산유국 성장동력 ‘흔들’
비산유국들은 코로나19 사태로 더 큰 어려움을 겪을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석유나 천연가스가 거의 나지 않는 이집트, 튀니지, 레바논, 요르단 등은 관광산업 의존도가 높은 나라들이다. 해외 투자 유치도 필요하다. 하지만 전 세계적인 이동제한으로 관광산업이 붕괴 직전으로 내몰렸다. 코로나19 사태가 장기화되면 이 국가들의 성장 동력 자체가 흔들릴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실제 레바논은 3월부터 채무불이행(디폴트) 상황에 놓여 있다. 이집트는 지난달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신속금융제도(RFI)를 통해 27억7000만 달러(약 3조3021억 원)의 긴급 자금 지원을 받았다.

가뜩이나 좋지 않은 경제사정에 코로나19 사태까지 겹치며 젊은 세대들의 일자리 부족과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글로벌 시장조사기관 스태티스타에 따르면 이집트(32.4%), 요르단(36.7%), 튀니지(34.8%)의 지난해 청년 실업률은 30%를 넘어선 상태다.

특히 코로나19 여파로 이들 국가의 20, 30대가 선호하는 산유국의 일자리는 앞으로 더욱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저유가로 인한 재정난과 외국인 인력 관리의 어려움에 직면한 산유국들이 향후 채용을 줄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집트의 명문 카이로대를 졸업한 뒤 UAE 등 걸프 국가에서 교사 자리를 찾고 있는 한 20대 이집트인은 “이미 산유국의 일자리는 많이 줄어들었다. 게다가 과거에 비해 자국민 채용을 훨씬 강조하고 있다”며 “코로나19로 어떤 후폭풍이 불지 걱정”이라고 말했다.
 
이세형 카이로 특파원 turtle@donga.com
#코로나19#중동국가#봉쇄 조치 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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