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대기업 대관 담당자에게 새 국회 초기라 바쁘지 않으냐고 물었더니 이런 답이 돌아왔다. 워낙 기울어진 운동장인 데다 초선 의원이 절반을 넘다 보니 사람을 만날 수도, 만날 필요도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기업의 말이 먹힐 수 있어야 만나서 설득이라도 하죠. 지금은 여당 의원 177명이 들어가 있다는 텔레그램 방에서 어떤 정책이 갑자기 툭 튀어나와도 공론화 과정 없이 법제화될 수 있잖아요. 우리가 제일 무서운 건 이런 예측 불가능성입니다.”
한 경제단체인은 이런 말도 했다.
“대기업을 살리자는 말 대신 산업생태계를 살리자고 하면 그래도 귀 기울이는 것 같아요. 구조조정이 필요하다는 말 대신 산업 구조의 효율화가 잘 진행되면 또 다른 일자리가 창출된다고 하면 그래도 들어는 줍니다. 같은 뜻인데 직설적으로 이야기하면 아예 들을 생각을 안 하니 요새 어떻게 하면 다르게 표현할까 고민하는 일이 잦습니다.”
슈퍼 여당의 탄생을 맞이한 재계의 분위기는 이랬다. 매우 떨고 있고, 많이 무기력하지만 그래도 잘 설득하면 혹시나 받아들여질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희망이 있다고나 할까.
이미 재계의 두려움은 현실화되기 시작했다. 최근 입법 예고된 상법, 공정거래법, 노동법 개정안은 대주주의 경영권을 위축시키는 대신 노동계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특히 상법 개정안의 감사위원 선임 및 해임 규정은 글로벌 행동주의 펀드들의 한국 기업 공격에 큰 힘을 실어줄 가능성이 높다.
지금은 대주주가 뽑은 이사들 중 감사위원을 선정하기 때문에 의결권 제한이 일부 있어도 대체로는 현 경영진이 원하는 감사위원이 뽑힌다. 정부여당은 바로 이 점이 불만이다. 감사위원의 독립성이 확보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감사위원을 따로 뽑으면서 대주주 의결권에 큰 제한을 두게 했다. 대주주는 특수관계인을 포함해 3%의 의결권만 인정하는 반면 일반 주주는 각각 3%의 의결권을 갖는다. 예를 들어 지분을 40% 가진 대주주라도 주주총회에서 감사위원을 뽑을 땐 3%만 의결권을 인정받는 반면에 3%의 지분을 가진 헤지펀드가 다른 3% 지분을 가진 세력들과 연합할 경우 3+3+3… 식으로 최대 60%까지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다. 글로벌 행동주의 펀드에 감사위원 자리를 주는 한이 있더라도 대주주에겐 안 주겠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감사위원은 정말 중요한 자리다. 이사회에서 행사할 의결권은 없지만 기업의 모든 정보를 들여다볼 수 있다. 대주주로부터 독립돼야 하는 건 맞지만 그렇다고 우리 기업의 내밀한 정보를 글로벌 투기세력에게 다 노출시키는 위험까지 감수해야 하는 건 아니다. 감사위원 독립성 확보의 목적이 기업을 제대로 굴러가게 해 더 큰 수익과 더 많은 일자리로 사회에 기여하게 하자는 것이지 기업의 간, 쓸개를 다 빼주자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여권 일각에서 나오기 시작한 대기업 사내유보금의 협력업체 지원 방안도 한숨이 나온다. 사내유보금은 현금(성 자산)만 아니라 땅, 기계, 공장 등도 포함한다. 현금으로 두는 건 대체로 3개월 정도의 운영자금이다. 그런데도 이를 협력업체에 지원하라고 하면 운영자금은 필수이므로 기계, 공장 등 투자분을 줄일 수밖에 없다. 글로벌 경쟁사보다 반 발 앞선 투자가 오늘날 초일류 반도체 기업을, 세계인이 환호하는 자동차 기업을 일으킨 원동력인데 이걸 하지 말란 뜻과 같다.
이제 ‘사회의 부가가치는 기업이 만든다’는 당연한 사실에 대해서조차 동의가 필요한 세상이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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