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돌이 시인[이준식의 한시 한 수]〈63〉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6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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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린 풀 미풍에 하늘대는 강 언덕, 높다란 돛대 올린 외로운 밤배./광활한 들판으로 별들이 쏟아지고 흘러가는 큰 강 위로 달이 용솟음친다./명성이 어찌 문장으로 드러나리? 관직마저 늙고 병들었으니 그만둘밖에./정처 없이 떠도는 신세 무엇에 비기랴. 천지간에 한 마리 갈매기라네. (細草微風岸, 危檣獨夜舟. 星垂平野闊, 月涌大江流. 名豈文章著, 官應老病休. 飄飄何所似, 天地一沙鷗.) ―‘떠도는 밤, 회포를 적다(여야서회·旅夜書懷)’ 두보(杜甫·712∼770)


별빛 쏟아지는 평원, 달빛 넘실대는 강, 더없이 느긋하고 평온한 밤이었을 테지만 애석하게도 지금은 한갓진 유람길이 아니다. 가족을 거느린 시인은 배를 하나 얻어 쓰촨(四川) 지역을 무작정 떠돌아야만 했다. 이따금 자신의 시명(詩名)을 높이 산 지방관들이 연회에 초청하면 얼마간 숙식은 해결할 수 있었지만 거처불명의 떠돌이 신세를 면키는 어려웠다. 안녹산의 난이 막 휩쓸고 간 뒤끝이라 사회는 혼란했고 자신을 아껴주던 절도사의 죽음, 관직에 있는 조카로부터의 냉대, 간관(諫官)으로서 올곧게 나서다 빚어진 주변 관료와의 불화, 보직 없이 허명뿐인 관직 등 개인적인 불운까지 겹치던 시기였다.

당시 두보는 사대부 사이에 제법 시명이 알려져 있었고 또 현종에게 문장을 지어 올려 한때나마 인정을 받기도 했기에 그 나름대로 문장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을 것이다. 하나 “황제가 요순(堯舜)의 반열에 오르도록 보필하고 세상 풍속을 후덕하게 하겠다”는 그의 꿈은 현실과 괴리가 컸다. 문장으로 명성을 드러낼 수 없다는 건 자포자기 같기도 하고 재능을 인정받지 못한 원망을 반어적으로 항변한 듯도 하다. ‘늙음과 병’은 불우했던 선비들이 으레 내세웠던 구실, 하지만 쉰넷의 시인으로서는 결코 엄살일 수만은 없는 절박한 탄식이었을 것이다.

이준식 성균관대 명예교수
#떠돌이 시인#떠도는 밤#회포를 적다#여야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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