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조장에 출근한 레돔이 아침 일찍 전화를 하면 불길하다. 무슨 문제가 생겼다는 것이다. 프랑스에서 수입한 샴페인 핸들링 기계 문짝 고리가 부서졌다고 한다. 쇠로 된 문짝에 새로운 구멍을 내야 한다는 것이다. 쇠문에 구멍을 어디 가서 내는지 모르겠지만 빨리 수리하지 않으면 큰일 난다니까 일단 문 3개를 들고 충주를 전전하기 시작한다.
“혹시 이런 쇠에 구멍 내는 데를 아세요?” 네 군데의 철물점을 다닌 뒤 어떤 철공소를 알게 된다. 철공소는 바쁘다. 내가 들고 간 이상한 쇠문을 이리저리 보고 쇠 뚫는 드라이버 기계 앞에 대보고 해도 방법이 안 나오니 다른 데 가보란다. 충주에 철공소가 이렇게 많았나. 세 번째 철공소에 이르자 내 얼굴이 사색이 된다. 이러다 오래 못 살 것 같다. 내 불쌍한 표정에 한 분이 고쳐주시겠단다. 잘라서 뚫은 뒤 다시 용접을 하면 된단다. 숨은 고수, 하느님을 만난 것 같다.
쇠문을 고쳐다 주니 이번엔 포도 나뭇잎을 갉아먹는 벌레가 생겼다고 울상이다. 난 모르겠다고 도망가 버렸더니 몇날 며칠 포도밭에서 한 잎 한 잎 살피며 벌레를 잡는다. 저러다 일사병 걸리겠다 싶어 인터넷을 뒤지니 ‘흙살림’에서 미생물로 만든 약이 있었다. 벌레 잡는 약을 주문하고 나니 예초기가 말썽이다. 이놈의 기계는 지금까지 100번은 고친 것 같다. 예초기 대신에 2m짜리 큰 낫이 더 좋겠다고 한다. 큰 낫을 사러 충주 철물점을 다 다녀도 없다. 이 남자는 왜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것들만 해달라는지 모르겠다. 면 이불이나 인견 팬티, 발가락양말, 이런 거를 사달라면 당장 해결해주겠는데 말이다.
이 와중에 내 휴대전화도 안 된다. 뒤적여보니까 사진이 5000장이 넘고 동영상과 서류 같은 것들이 뒤죽박죽이다. 노트북에 이 모든 것을 다 옮기려고 하니까 노트북 메모리에도 빨간불이 들어와 있다. 하드디스크에 옮겨볼까 했더니 가진 하드 4개 전부 용량 초과다. 지워야 할 것들을 보다가 안에 든 영화 한 편을 보느라 시간 다 보내버렸다!
처리해야 할 양조장 서류가 산더미처럼 쌓였는데 늘 엉뚱한 짓을 한다. 세금계산서 발행하려고 컴퓨터 켰다가 홈택스 안 가고 엉뚱한 데 가서 이것저것 보다가 시간 다 보내고 눈이 피곤해서 그냥 자버린다. 메시지 보내려고 휴대전화 켰다가 페이스북 들어가서 몇 시간 놀다가 나와서는 바쁘다고 난리다. 양조장 홈페이지 만들기도 반쯤 하다가 말았고, 스토어에 신제품 올리는 것도 못 하고 있다. 마케팅이다 브랜딩이다 뭐다 하는 건 생각도 못 하고 있다.
새로운 양조장을 건축해야 하는데 건축설계며 토목이며 허가사항 받아야 한다고 입으로만 노래를 부른다. 건축 비용 조달을 위해 융자를 알아봐야 하는데 은행 가기가 싫다. 괜히 돈 빌렸다가 못 갚아서 압류 들어오면 어디 가서 살아야 하나 이런 고민을 하고 앉았다. 과연 양조장을 지을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내가 지금 가는 곳이 산인지 바다인지 모르겠다.
집 청소는 몇 달째 밀려 있다. 작년 여름옷 정리도 못 했는데 올여름이 와버렸고, 아마 저 지난 겨울옷도 정리해야 한다고 노래를 부르다가 겨울이 오겠지. 레돔은 내가 어떻게 사는지 페이스북을 통해서 안다. “어, 여기 갔었어? 어딘데? 이 사람들은 누구야? 이거 맛있어 보이는데, 뭔데?” 아침에 밥을 먹으며 이런저런 질문을 던진다. 나는 안경을 찾느라 정신이 없다. 10개가 넘는 안경을 여기저기 흩어 놓았건만 필요할 때는 하나도 안 보인다. 냉장고가 고장 났는데 안경이 없어 인터넷 쇼핑을 못 하고 있다.
겨우 몇십만 원짜리 물건에 이렇게 고민해야 하는 것이 인생은 아니잖아. 마트에 가서 당장 새 냉장고를 주문해버린다. 냉장고를 주문하고 나니 기분이 날아갈 것 같다. 잘 돌아가는 깨끗한 냉동실에 얼음을 잔뜩 얼려둬야지. 아이스커피를 마시며 멘털 붕괴, 육체 소멸의 총체적 난국을 찬찬히 해결해보기로 한다. 별일 없이 잘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왜냐면 세상에 죽으란 법은 없으니까.
※ 프랑스인 남편 도미니크 에어케(레돔) 씨와 충북 충주에서 사과와 포도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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