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리얼리즘[이은화의 미술시간]〈117〉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6월 25일 03시 00분


오토 딕스 ‘플랑드르’, 1934∼1936년.
오토 딕스 ‘플랑드르’, 1934∼1936년.
독일 나치 시대에는 조국애를 고양하거나 전쟁을 미화한 예술은 장려됐지만, 반대로 전쟁의 비참함을 표현하거나 사회비판적 예술은 ‘퇴폐미술’로 규정돼 심한 탄압을 받았다. 나치 정권은 퇴폐미술을 정화한다는 명분 아래 독일 전역의 미술관에서 압수한 1만7000점의 미술품을 공개적으로 소각하거나 매각했다. 거기엔 독일의 리얼리즘 화가 오토 딕스의 작품 260점도 포함됐다.

이 그림은 딕스가 직접 참전했던 제1차 세계대전의 비극적 광경을 묘사하고 있다. 병사들의 시신은 진흙 범벅이 되었고, 포격으로 파괴된 참호들은 빗물로 인해 커다란 웅덩이가 됐다. 화면 오른쪽 병사는 아직 숨이 붙은 건지 추위와 두려움에 떨며 화면 밖 관객을 응시하고 있다. 어쩌면 눈을 뜬 채 죽은 상태일 수도 있다. 가운데 솟은 나무 기둥에 둘러쳐진 철조망은 피 묻은 예수의 가시관을 닮았다. 절망밖에 남지 않는 이 참혹한 전장은 플랑드르(벨기에 북부)의 치열했던 서부전선이다. 1차 세계대전은 독가스, 탱크, 항공기, 기관총 등 대량살상무기가 처음으로 사용된 총력전이었다. 7000만 명 이상의 군인이 참전했고, 이 중 약 1000만 명이 그런 신종 무기에 처참하게 희생됐다.

퇴폐미술가로 낙인찍힌 딕스는 드레스덴 미술대 교수직에서 해임된 후 독일 서남부의 시골에 칩거하던 시기에 이 그림을 그렸다. 대전 발발 이후 약 20년이 흐른 시점이었다. 딕스가 전쟁 중 쓴 일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벼룩, 쥐, 철조망, 유탄, 폭탄, 구멍, 시체, 피, 포화, 술, 고양이, 독가스, 카농포, 똥, 포탄, 박격포, 사격, 칼. 이것이 전쟁이다! 모두 악마의 것이다!” 그의 표현대로 전쟁은 더럽고 소름 끼치고 비참하고 악마 같은 것이다. 결코 영웅적이거나 낭만적일 수가 없다. 어느 평론가의 말처럼 ‘소름 끼치도록 두려운 인간의 건망증을 깨부수기 위해서’ 딕스는 반전(反戰)의 화가가 되어 이 잔혹한 유혈참사의 장면을 그리고 또 그렸다.
 
이은화 미술평론가
#오토 딕스#플랑드르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