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 내추럴해지는 지극히 개인적인 방법[포도나무 아래서/신이현]〈57〉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7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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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신이현 작가 ·프랑스인 남편 도미니크 에어케(레돔) 씨
신이현 작가 ·프랑스인 남편 도미니크 에어케(레돔) 씨
“내추럴 와인이 뭐예요? 그럼 지금까지 내가 마신 건 내추럴이 아닌 거예요?” 요즘 이런 질문들을 곧잘 받는다. 내추럴이 대세인지 내추럴 식탁, 내추럴 가든, 내추럴 스타일, 내추럴 하우스, 내추럴 대화, 내추럴 인생…. 어디나 다 내추럴이다. 어떤 프랑스 내추럴 와인 광고에 한 남자가 포도밭을 배경으로 벌거벗은 모습으로 나온 적이 있다. 내추럴은 아무것도 안 입는 것? 외설적인 느낌보다는 굉장히 자연스럽고 가벼우며 유머러스해 보였다.

내 인생에도 이런 순간이 있었던가 생각해 보니 어제도 느꼈다. 어떻게 사는지 모르겠지만 한 번씩 숨쉬기가 힘들 만큼 우울하다. 답답해서 시작한 것이 매일 저녁 집 앞 초등학교 운동장 걷기였다. 걷다 보니 걸치고 있는 것들이 성가셔서 신발을 벗고 작은 가방도 벗고 윗도리도 벗어버렸다. 맨발로 걷기 시작했다. 발바닥에 땅의 감촉이 느껴졌다. 지금 내 발 밑에 밟히는 이것이 지구구나, 내가 발을 딛고 사는 지구가 이런 느낌이구나. 참 단단하고 듬직하네…. 발바닥의 온 감각이 지구를 느꼈다. 지구는 자신이 살아있는 존재임을, 내가 밟고 있는 것이 대지의 여신의 등짝임을 알게 해주었다. 뭉클했다. 이런 기분을 느꼈던 또 다른 순간들이 있다.

얼마 전 바다에서 수영을 할 때였다. 찌는 더위였고 바닷물은 미지근했다. 주변에는 사람도 없었고 비가 살짝 뿌리는 것 같기도 했다. 출렁이는 바다에 들어가니 파도가 온몸을 두둥실 흔들리게 했다. 그때 나는 물의 감촉을 그대로 느꼈다. 바다의 무한한 크기가 느껴졌다. 달을 따라 밀려갔다 밀려오는 우주에 떠있는 물이었다. 나는 무한한 우주 공간에 흔들리며 떠있는 작은 존재임을 느꼈고 너무나 편안했다.

생각해보면 인생에서 이런 경험은 참 많다. 열대 나라에서 잘 익은 파파야를 먹을 때도 그랬다. 칼이 없어서 그냥 손가락으로 파파야를 반으로 잘랐다. 부드럽게 쪼개진 오렌지색 파파야 안에 검은 진주처럼 반짝이는 씨앗을 털어냈다. 너무 목이 말라 그냥 파파야 속에 입을 쿡 박고 먹었다. 목을 타고 파파야 즙이 흘러내리며 지저분해졌지만 먹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열대 땅의 열기와 농부의 땀, 먼지, 파파야 밭고랑을 흐르는 진흙탕 물의 맛이 그대로 느껴졌다. 과일을 먹으면서 그렇게 땅의 냄새와 열기를 느껴보긴 처음이었다. 강렬했다. 그 뒤부터는 과일을 먹을 때면 그때의 그 기분을 느껴보기 위해 집중하는 버릇이 생겼다. 밭에서 갓 딴 복숭아를 먹을 때 그 너머 희미하게 땅과 바람의 맛을 느낄 수 있을 때면 굉장히 기분이 좋아진다. 지구의 속 깊은 어딘가에서 길어 올린 물을 마시는 기분이 들었다.

내추럴 와인도 그런 것이다. 집에 내추럴 와인 한 병이 있다는 것은 와인이 온 땅과 그 해의 비바람, 그 풍경을 병 속에 봉인해둔 것과 같다. 내추럴 와인은 기본적으로 유기농 과일을 손으로 수확해서 착즙한 뒤 아무것도 넣지 않고, 필터링이나 살균을 하지 않은 방식으로 만든 와인을 칭하는 말이다. 말 그대로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술이다. 인간의 입맛에 맞는 와인을 제조하는 것이 아닌 자연이 준 그대로의 과일을 발효해서 만든 것이다. 과일이 자란 땅을 솔직하게 표현한 것이다. 술을 마셨을 때 ‘이건 너무너무 맛있다’는 평가는 입맛에 따라 각자의 취향이겠지만, 실제로 그 맛있는 술에는 소비자의 입맛에 맞추려고 많은 트릭을 쓴다.

언제부턴가 나는 술을 마실 때 ‘얼마나 맛있는가’보다는 얼마나 내추럴한가, 얼마나 신선하고 살아있는가에 중점을 두고 있다. 음식 또한 입에 짝 붙는 맛보다 재료 본연의 특징을 살리려고 애쓰는 요리사가 더 좋다. 바다에 가서 수영하며 우주의 기운을 느끼고 열대 나라에 가서 파파야를 먹으며 그 땅의 열기를 느끼며 사는 것이 인생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 내 인생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 바보같이 산다. 그런 와중에 냉장고에 내추럴 와인이 한 병 있다고 생각하면, 오늘 그것을 한잔 마셔야지, 생각하면 인생이 가벼워지는 기분이 든다. 한잔 마시면 숨이 쉬어진다. ‘인생이 내추럴해지는 개인적인 방법일 뿐이니 따라하지는 마세요.’
 
※ 프랑스인 남편 도미니크 에어케(레돔) 씨와 충북 충주에서 사과와 포도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습니다.
 
신이현 작가
#내추럴 와인#신선도#포도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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