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아홉 젊은 시인은 한 이웃 소녀와 두터운 정분을 쌓았지만 과거 시험을 위해 고향을 떠나면서 인연이 멀어졌다. 과거에 급제하고 관직에 오르자 주변에서 문벌을 따지며 둘을 갈라놓았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소녀를 향한 시인의 연모(戀慕)가 오죽 자별했으랴. 그는 서른일곱 늦은 나이에야 딴 여자와 결혼했다. 하지만 이별 뒤의 뒤늦은 연모, 그것도 터놓고 내색조차 못 할 연모라니 이 얼마나 부질없고 무모한가. 얼밋얼밋하다가 여자를 놓쳐버린 남자의 무기력 앞에서는 그저 공염불에 불과한 것을.
이후 상령(湘靈)이란 이 소녀를 그리는 회한의 정은 간단없이 쏟아졌다. 어느 동짓날 밤에는 “어여쁜 그 모습 볼 수 없으니 찬 이불조차 가까이 못 하겠네. 긴긴밤 어이 견디리? 우리 서로 외로이 잠들어야 하는 것을”이라 했고, “생이별, 생이별이라니. 괴로움이 마음에서 끊이질 않네. 더없는 괴로움에 쇠약해진 기운, 서른도 되기 전에 백발이 돋았네”라고도 했다. 무욕, 달관 혹은 현실 비판의 기조를 견지한 시인답지 않은 섬약한 호소가 낯설기만 하다. ‘황하수가 맑아지고 까마귀 머리가 하얘질 수 있다’는 억지, 그건 아마도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애써 부정하고픈 안타까움에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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