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혜원 대구지검 부부장검사(45·사법연수원 34기)가 13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박원순 전 서울시장과 팔짱 낀 사진과 함께 올린 글이다. 피해자를 조롱하는 듯한 뉘앙스 때문에 비판을 받았던 이 게시물은 성인지 감수성에 대한 이해 역시 부족해 보인다.
아마도 진 부부장은 “피해자의 말이라고 다 믿을 수는 없다”는 주장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진 부부장의 발언을 비판하는 사람들 역시 피해자의 주장을 무조건 다 믿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피해자의 입장에서 그의 목소리를 경청해야 한다는 대원칙이 훼손되어선 안 된다는 게 그들의 공통된 인식일 것이다.
대법원은 2018년 한 대학교수의 여학생 성희롱 사건에서 성인지 감수성이라는 개념을 정립하는 판결을 했다. 당시 주심을 맡은 권순일 대법관은 “사건이 발생한 맥락에서 성차별 문제를 이해하고 성인지 감수성을 잃지 않아야 한다”며 “피해자가 처한 특별한 사정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채 피해자 진술의 증명력을 가볍게 배척하면 안 된다”고 판시했다.
당시 하급심 재판부는 피해 여학생들이 성희롱 발생 이후에도 교수의 강의를 들었고 즉시 피해를 신고하지 않은 사실 등을 이유로 “여학생들의 진술을 신뢰할 수 없다”며 교수의 손을 들어줬다.
대법원은 이 결정을 뒤집었다. 사건 당시 피해 여학생이 처했던 입장을 고려하면 진술에 신빙성이 있다고 봤다. 대법원은 “가해자와 피해자가 교수와 학생 관계라는 점, 성희롱 행위가 교수의 연구실 등에서 발생했고, 교수가 추천서 등을 빌미로 성적 언동을 했으며, 이러한 행위가 반복되었다는 점 등을 고려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일반적이고 평균적인 사람’과 ‘피해자들과 같은 처지에 있는 평균적인 사람’을 구분해 후자의 관점으로 피해자 진술을 판단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일반인의 입장에서만 판단한다면 은연중에 가해자 중심적인 사고와 인식을 토대로 평가를 내릴 수 있다”는 게 재판부의 지적이었다.
대법원은 피해자가 비난 여론 등 ‘2차 피해’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즉시 신고를 하지 못하기도 하고, 신고를 한 이후에도 소극적인 태도를 보일 수 있다고 강조했다. 피해자와 같은 입장에 놓여보지 않은 사람이 성폭력 사건을 바라볼 때 사건 발생 전후 상황, 가해자와의 관계, 피해자가 속한 집단의 성격, 당시 심리상태 등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은 이제 상식으로 자리 잡아 가고 있다.
성인지 감수성 판결은 ‘피해자의 말을 무조건 믿으라’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의 말을 들을 때 피해자의 관점에서 생각해보라’는 의미다. 성인지 감수성을 강조하는 것이 ‘피해자 제멋대로주의’를 용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판단의 잣대가 자칫 가해자 입장에 치우치지 않도록 피해자의 시각을 충분히 감안해 ‘관점의 평등’을 보장하자는 것이다.
최근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 등 주요 성폭력 사건에서 성인지 감수성을 강조하는 판결이 잇따라 나오고 있다. 이번 박 전 시장 성추행 의혹 사건을 다루는 과정에서 이런 진전에 역행하는 움직임이 나온다면 결코 용납해선 안 된다. ‘내가 피해자라면’이라고 한번쯤 상상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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