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현장을 가다]
면책권 제한 및 예산 삭감 요구 거세… 경찰 약화시 ‘무법지대’ 우려
트럼프 “좌파 공권력 흔들기”
美 11월 대선 의제 급부상
“경찰 예산 삭감하라.” “정의 없이 평화도 없다.”
미국 독립기념일이던 4일 워싱턴 백악관 앞의 ‘흑인 생명은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 광장’을 찾았다. 100여 명이 인종차별을 규탄하고 경찰 개혁을 촉구하며 이런 팻말을 든 채 시위를 벌였다. 흑인이 많았지만 히스패닉과 백인도 적지 않게 눈에 띄었다. 원래 16번가였던 이 도로 이름은 5월 25일 백인 경관의 목 누르기로 인해 숨진 미네소타 비무장 흑인 조지 플로이드 사건 이후 인종차별 항의 시위대의 구호와 같은 이름으로 바뀌었다.
현장에서 만난 제이미 젠슨 씨는 “인종차별 반대 구호를 외치는 데서 끝내지 말고 경찰 개혁 같은 실질적인 변화를 이끌어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날 링컨기념관, 의회 앞 광장, 맬컴엑스공원 등 워싱턴 곳곳에서 비슷한 시위가 잇따랐다.
시위대는 경찰의 공권력 집행 과정에서 유색인종이 집중적으로 피해를 보는 것은 폭력 성향이 강한 소수 경찰의 문제가 아니며, 이를 개선하려면 경찰 조직 자체를 재건하는 수준의 대대적 변화가 불가피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 총기 보유가 허용되는 미국의 현실을 감안할 때 경찰 개혁이 치안 불안을 심화시킬 것이란 반론도 상당하다.
특히 11월 3일 대선이 약 넉 달 앞으로 다가오면서 이 문제가 대선 주요 의제로 급부상하는 모습이 뚜렷하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는 경찰개혁 요구를 좌파의 공권력 흔들기 및 자신을 낙선시키려는 시도라고 주장한다. 이에 야당 민주당이 경찰 개혁 촉구로 맞서면서 워싱턴 정계의 대립도 심화하고 있다.
○ “경찰 이대로는 안 된다”
미 인구통계국 등에 따르면 미 경찰은 1만8000여 개의 관련 조직과 110만 명의 인력을 보유한 거대 조직이다. 연방정부 경찰인 연방수사국(FBI)이 있고 50개 주가 각각 주 경찰, 지방(카운티) 경찰, 군 경찰, 국립공원 경찰, 보안관, 고속도로 순찰대 등의 조직을 별도로 운영한다. 지하철 경찰, 대학 경찰, 의회 경찰 등도 있다.
플로이드가 숨진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시 의회는 최근 경찰 조직을 해체하고 대신 ‘사회안전 및 폭력예방국’이라는 조직을 신설하는 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이 법안이 11월 주민투표까지 최종 통과하면 미니애폴리스에서는 이제 ‘경찰’이란 단어가 사라진다. 기존 경찰서는 폐쇄되고 경찰이 하던 역할은 공무원이 맡는다.
경찰 해체까지는 아니더라도 경찰 예산을 삭감해 조직 규모와 권한을 줄이자는 여론도 상당하다. 특히 경찰의 면책특권을 제한하자는 지적이 많다. 유색인종 사망에 연루된 경찰 대부분이 애초에 기소조차 되지 않거나, 재판에 넘겨져도 대부분 무죄로 풀려나는 상황을 손봐야 한다는 의미다. 플로이드 사망 직후 죽음에 연루된 경찰 4명이 모두 구속됐지만 주범 격인 데릭 쇼빈 전 경관(44)을 제외한 나머지 3명은 모두 이미 보석으로 풀려났다.
지난달 말 USA투데이와 비영리단체 ‘퍼블릭 어젠다’의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90%는 ‘경찰의 몸에 보디캠을 반드시 달아야 한다’고 답했다. 80%는 ‘위력이 사용된 사건 처리는 72시간 이내에 전부 내용을 공개해야 한다’고도 했다. ‘경찰을 이대로 놔둬도 된다’는 답은 불과 7%에 그쳤다.
경찰의 임용 기준을 대폭 강화하고, 예산을 줄이고, 담당 업무 자체를 바꿔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가정폭력, 정신질환 등의 문제는 사회복지사 등이 맡고 도로 정비와 교통질서 관리는 카메라, 드론 등 정보기기 등을 활용하자는 의미다. 경관의 총에 맞은 유색인종의 상당수가 교통단속 과정에서 숨졌다는 점도 이와 무관치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의회는 현재 ‘조지 플로이드 경찰 정의법’이란 이름의 경찰 개혁 법안을 심의하고 있다. 핵심 내용은 △목 누르기 등을 통한 용의자 진압 금지 △예고 없는 가택 수색 금지 △경찰의 권력 남용에 관한 전국적 데이터베이스(DB) 구축 △경찰의 면책특권 제한 등이다.
○ 떠나는 경찰, 증가하는 범죄율
경찰 ‘개혁’이 ‘약화’로 이어져선 안 된다는 반론도 상당하다. 적은 수의 공권력이 광대한 국토를 담당하며 총기 소유가 허용되는 미국에서 경찰의 힘이 감소하면 치안 불안 우려가 커진다는 의미다. 사회복지사 같은 공무원이 경찰의 빈자리를 메울 수 없다는 지적도 상당하다. 무기를 소유하지 않은 이들을 가정폭력 현장에 투입하면 큰 부상을 입거나 최악의 경우 사망할 수도 있다.
이달 초 워싱턴 인근 버지니아주 매클레인 지하철역 앞에서는 주민 10여 명이 종이 피켓을 들고 경찰 옹호 시위를 벌였다. 일부는 ‘경찰 없이 평화 없다(No Police No Peace)’라는 문구를 들고 있었다. 인종차별 항의 시위대가 사용하던 ‘정의 없이 평화 없다’를 빗대 경찰의 중요성을 강조한 문구였다.
이미 일선 경찰의 사기는 상당히 떨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CNN에 따르면 지난달 미니애폴리스 경찰 7명이 사표를 냈다. 뉴욕주 버펄로에서는 비상대응팀 소속 경찰관 57명 전원이 사임계를 냈다. 이들은 지난달 초 인종차별 항의 시위 현장에서 동료 경찰 2명이 70대 노인을 밀쳐 넘어뜨린 뒤 무급정직 징계를 받자 거세게 반발하며 사표 카드를 꺼냈다. 6월 은퇴를 신청한 뉴욕 경찰의 수는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4배 늘었다.
치안 불안도 가시화했다. 최대 도시 뉴욕에서는 올해 초부터 이달 12일까지 약 반 년간 634건의 총격 사건이 발생했다. 지난해 같은 기간(394건)보다 60% 늘었다. 최근 잇단 총격 사건으로 뉴욕의 12세 및 15세 청소년, 한 살배기 아기가 숨지는 등 미성년 피해자도 상당하다. 미니애폴리스 지역언론 스타트리뷴에 따르면 6월 총격 사건으로 인한 사상자 수는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47% 늘어난 190여 명이었다. 플로이드 사태 후 도심 내 공원에는 노숙자 300여 명이 몰리고 마약상과 성매매 알선업자들의 활동도 늘었다.
한국계인 조셉 오 워싱턴 경찰청 지능범죄수사대장은 기자에게 “총기 보유국인 미국에서 경찰이 무너지면 사회 전체가 무너진다. 미 경찰이 다른 나라와 달리 검찰 기소권까지 행사하는 이유도 그만큼 치안 유지의 필요성이 크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와 통화하는 도중 수시로 무선 교신 및 현장 상황 보고 내용이 들려왔다. 앤드루스 공군기지 앞에서 대통령 경호 업무를 수행 중이라는 그는 “백악관 비밀경호국(SS)조차 우리 같은 경찰의 지원이 없으면 일하기 어렵다. 이런 경찰의 역할이 규정된 경찰법은 함부로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 대선 문화전쟁 의제로 떠오른 경찰 개혁
트럼프 대선 캠프는 최근 경찰 예산을 삭감하면 흉악 범죄가 급증할 것이란 TV 광고를 내보내고 있다. 텅 빈 911 응급상황실에 전화가 걸려온다. 자동응답기가 “경찰 예산 삭감 요구 때문에 아무도 없다. 강간은 1번, 살인은 2번, 가택침입은 3번을 누르고 전화번호와 이름을 남기라”고 한다. 이후 ‘조 바이든의 미국에서는 안전할 수 없다’는 글이 등장한다. 한마디로 민주당 대선 후보인 바이든 전 부통령의 지지자들이 주장하는 경찰 예산 삭감은 미국의 치안을 훼손한다는 주장이 담겼다.
트럼프 대통령은 경찰 개혁 논란을 공과가 있는 유명인의 동상 철거 논쟁과 마찬가지로 대선의 문화전쟁 의제로 삼을 뜻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14일 경찰 덕분에 목숨을 구한 시민, 이들을 도운 경찰들을 백악관으로 초청했다. “여러분 같은 영웅들에게 감사하고 싶다. 나라를 지키는 용감한 경찰 편에 설 것”이라고도 치하했다. 하루 전 트위터에는 “미 역사상 경찰이 이렇게 형편없는 취급을 당한 적이 없다. 경찰이 급진 좌파 정치인들에 맞서 더 강하게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14일 CBS 인터뷰에서 진행자가 ‘왜 많은 흑인이 법 집행기관에 사망하는가’란 질문에 “백인 사망자가 더 많다”고 답했다. 폭스뉴스에는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의 근거지인 미 3대 도시 시카고의 범죄율 및 총기 사고 비율 증가를 언급하며 “전임 행정부가 경찰 공권력의 확립 문제를 등한시했다”고 비판했다.
트럼프 행정부가 경찰 개혁 요구에 응할 생각이 없다는 뜻을 밝히면서 11월 대선 전까지 가시적인 개혁 작업이 어려워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백인 중심인 경찰 내 권력 구도도 개혁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으로 꼽힌다. 2013년 기준 미 지방경찰의 72.8%가 백인이다. 흑인과 라틴계는 각각 12.2%, 11.6%에 불과하다. 비영리단체 ‘마셜프로젝트’에 따르면 미 15개 주요 도시 중 테네시주 멤피스를 제외하면 모두 백인이 청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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