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체전 메달’ 압박하는 지자체… 위험한 일탈 부추긴다[인사이드&인사이트]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7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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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자체팀 스포츠 폭력의 이면

트라이애슬론(철인3종) 유망주였던 고 최숙현 선수가 극단적인 선택을 한 뒤로 ‘스포츠 폭력’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한국 쇼트트랙을 대표하는 심석희가 지난해 성폭력 피해를 고백해 큰 충격을 줬지만 크게 달라진 건 없는 셈이다. 이에 대해 한국 스포츠의 구조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라는 목소리는 다시 힘을 얻고 있다.

○ 성적 지상주의 부추기는 전국체전

2018년 보스턴 마라톤대회 우승은 일본의 ‘공무원 마라토너’ 가와우치 유키(川內優輝)에게 돌아갔다. 가와우치는 고등학교 때까지 전문 육상 선수였지만 부상으로 인한 기량 저하 때문에 대학에 가서는 육상 동아리에서만 활동했다. 대학 졸업 후에도 육상 실업팀이 아니라 공무원을 선택했고 사이타마 현청에서 동호인 마라토너로 활동했다. 이런 독특한 이력 때문에 보스턴 마라톤 우승 당시 일본은 물론이고 한국에서도 화제가 됐다.

그런데 사실 ‘공무원 선수’가 엘리트 스포츠 대회에서 빼어난 성적을 거두는 건 한국에서는 아주 흔한 일이다.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아경기에서 여자 사이클 4관왕을 차지한 나아름은 경북 상주시청, 수영 여자 개인혼영 금메달을 목에 건 김서영은 경북도청, 육상 여자 허들 110m에서 금메달을 목에 건 정혜림은 광주시청 소속이었다. 그러니까 ‘문자 그대로만 따지면’ 이들 역시 공무원 신분으로 아시아경기 금메달리스트가 된 것이다.

물론 공무원이라는 신분만 같을 뿐 일본과 차이는 크다. 가와우치는 다른 공무원과 마찬가지로 공채 시험을 통해 일자리를 얻었다. 다른 공무원과 하는 일도 똑같다. 반면 한국 선수들은 ‘특채 계약직 공무원’ 신분이다. 이들은 사무는 보지 않고 운동만 한다. ‘아마추어 선수’로 분류되지만 실질적으로는 지방자치단체에서 연봉을 받는 ‘프로 선수’인 셈이다. 이들 가운데는 억대 연봉을 받는 선수도 적지 않다.

지자체에서 사실상 프로 선수를 거느리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체육계 인사들은 “전국체육대회(전국체전) 때문”이라고 입을 모은다. 그리고 지방자치단체장을 선거로 뽑게 된 이후 지자체들 간의 경쟁인 전국체전 성적이 더욱 중요하게 됐다고 평가하고 있다. 다음 번 선거에 내세울 수 있는 ‘업적’이 하나라도 더 필요하기 때문이다.

한 종목 협회 관계자는 “대다수 국민에게 전국체전은 잊혀진 존재지만 지자체의 사정은 다르다. 각 지자체에서 직접 팀을 꾸리거나 산하 공기업을 통해 아니면 ○○체육회라는 이름으로 실업팀을 운영하는 이유는 전국체전 딱 한 대회 때문이라고 보면 된다”며 “올림픽은 몰라도 아시아경기보다 전국체전이 더 중요한 건 맞다. 아시아경기에서 금메달을 따온 선수가 속한 ○○체육회가 전국체전 1회전에서 탈락했다는 이유로 팀을 해체한 적도 있다”고 전했다.

다른 종목 단체 관계자는 “기업 팀은 사회 공헌이라는 취지도 있기 때문에 운동부에 무리하게 성적을 내라고 압박하는 일이 드물다. 그러나 지자체는 단체장 임기 내에 성과를 내야 하기 때문에 과도한 목표를 요구하는 일이 많다”면서 “그래도 지자체에서 팀을 운영하지 않으면 소위 비인기 종목 사람들은 밥 벌어 먹고 살기가 힘들다. 그래서 어떻게든 이런 요구에 맞춰 주려다 보니 ‘사고’가 터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 지도자도 결국 계약직 공무원 신세

사정이 이렇다 보니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일이 생긴다. 이번에 사건이 터진 트라이애슬론은 비인기 종목 가운데 비인기 종목이라고 할 수 있지만 실업팀은 12개나 된다. 세팍타크로 역시 한국에서 절대 인기 종목이라고 하기 어렵지만 실업팀 7곳이 운영 중이다.

한 체육계 인사는 “(최숙현 사태는) 이렇게 비인기 종목이 전국체전에서 쉽게 메달을 딸 수 있는 ‘틈새시장’이라고 판단한 지자체에서 우후죽순처럼 팀을 창단해 생긴 일”이라면서 “사기업이 이런 비인기 종목 팀을 운영하는 건 이제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일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지자체 팀에서는 선수뿐만 아니라 지도자 역시 대부분 계약직 공무원 신분이다. 이들 역시 신분이 불안정하기 때문에 강압적인 방법을 써서라도 실적을 올려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한 지자체 팀 지도자는 “현역 시절 세계선수권대회에서 두 번 우승했다. 개인적으로는 이에 대해 자부심이 있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그런데 팀이 성적이 조금만 떨어지면 일부 공무원들은 이를 가지고 ‘현역 시절 그렇게 잘했다면서 왜 지도자로는 이 모양이냐’고 인격을 무시하면서 폭언을 하기도 한다. 그럴 때는 나도 순간 욱 하는 마음이 올라온다. 이런 스트레스를 선수들에게 (폭력으로) 푸는 지도자도 적지 않은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한 사기업 팀 관계자는 “전국체전은 지방을 순회하면서 열지 않나. 우리도 대회 때 회사 관계자가 격려차 방문하면 예의상 식사 대접 정도는 한다. 그런데 지자체 팀을 보고 있으면 아예 ‘접대’ 수준으로 공무원을 모신다”면서 “지도자도 받는 돈이 뻔한데 어디서 접대비를 마련하겠나. 인성이 덜 된 지도자가 없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러나 일부 지도자가 선수들로부터 ‘상납’을 받는 데는 이런 구조도 한몫 거들고 있는 게 현실”이라며 안타까워했다.

비인기 종목에 몸담고 있는 이들은 이런 사정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에 얼마 되지 않는 사기업 팀에 지도자 자리가 생기면 국가대표급 선수 같은 경우 이른 나이에 서둘러 유니폼을 벗기도 한다. 그리고 이들 가운데 일부는 평소에는 지도자로 사기업 팀에서 활동하면서 전국체전 때는 원 소속 팀 선수로 뛰겠다고 약속하고 실제로 전국체전에 출전하기도 한다.

○ 무자격 팀 닥터는 어떻게 막을까

이렇게 각 지자체 공무원들이 선수와 지도자들의 생살여탈권을 쥐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당 종목 사정을 속속들이 알기는 쉽지 않다. 그런 이유로 해당 지역 각 종목 ‘실세’들에게 선수단 운영에 관해 자문하는 일이 적지 않다. 이 실세는 해당 종목 ‘에이스 선수’일 때도 있고 해당 종목 선수 출신이거나 애호가로 지역 사회에서 영향력이 큰 유지일 때도 있다.

예컨대 경주시체육회 트라애슬론 팀에서는 전국체전 8회 우승을 자랑하는 ‘에이스 선수’ 장모 씨가 실세로 군림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이런 실세들은 팀에 조금 더 자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자기 사람’을 꽂아 넣기도 한다. 실제로 이번에 문제가 된 ‘팀 닥터’ 안주현 씨는 원래 한 병원에서 장 씨를 치료하던 인물이었다. 안 씨는 의사면허증도 물리치료사 자격증도 없지만 장 씨를 등에 업고 팀 내에서 권력을 휘둘렀다.

팀에서 ‘트레이너’라고 불리는 사람들 가운데는 무자격자가 적지 않다. 한 체육계 인사는 “각종 협회나 아카데미에서 트레이너 자격증을 발급하지만 솔직히 말해 이런 자격증은 돈만 주면 아무나 딸 수 있다”며 “이런 이들 배후에 실력자가 있다는 걸 선수들도 눈치로 다들 알기 때문에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참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는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지난해 11월 발표한 ‘실업팀 선수 인권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신체 폭력을 당한 뒤 대처 방안에 대해 응답한 182명 가운데 3분의 2 이상(67.0%)이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고 답했다. 이들은 “내부의 일을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면 배신자 이미지가 될 거라는 두려움이 많다” “내가 신고를 하면 팀을 없애 버리니 신고하기가 어렵다”고 아무 행동도 취하지 못한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실제로 도움을 요청했을 어떤 결과가 나타났는지 물었을 때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와 ‘상담으로 끝났다’는 사례가 각 40%로 가장 높은 결과를 나타냈다. 한 실업팀 선수는 “협회 쪽이 그쪽(지도자 또는 실세) 분들인데 무슨 도움을 받겠나. 대한체육회에서도 이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자꾸 ‘알아서 해결하라’는 말만 반복한다. 경찰에서도 ‘성추행이나 폭행당한 구체적인 증거가 없으면 걸 수 있는(신고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식으로만 이야기 한다”면서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결국 우리만 피해를 볼 테니 그냥 잠자코 있자는 쪽으로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이유로 전문가들은 스포츠 폭력을 근절하려면 숫자 1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단일(1) 창구로 접수를 받아, 신속하게 1차 조사를 마치고, 가해자가 밝혀질 경우 원(1) 스트라이크 아웃 조치가 필수라는 것이다. 또 모든 팀 닥터나 트레이너를 포함해 모든 지도자들 프로필 공개를 의무화해야 한다는 주장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프로필 공개를 거부하면 실업팀 또는 학교 운동부에서 일자리를 얻을 수 없도록 하자는 것이다.

탁민혁 영국 러프버러대 교수(스포츠사회학)는 “영국은 경기단체가 선수 수급부터 육성까지 스스로 책임진다. 이 때문에 대중 평판에 민감하고 변화를 수용하는 데 적극적이다. 반면 한국은 상황이 어떻든 지자체에서 예산이 나오다 보니 선수 보호 문제에 굳이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된다”며 “전국체전에 생계가 걸린 대다수 경기인의 저항을 피하면서도 선수 보호에 유리한 환경으로 만들 수 있는 기술적인 노력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황규인 kini@donga.com·김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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