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서라는 이름의 직업[현장에서/김소영]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7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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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순 전 서울시장을 고소한 피해자 측의 13일 기자회견. 원대연 기자 yeon72@donga.com
박원순 전 서울시장을 고소한 피해자 측의 13일 기자회견. 원대연 기자 yeon72@donga.com
김소영 사회부 기자
김소영 사회부 기자
직장인 A 씨(31)는 3년 전 다니던 직장에서 겪은 일이 잊혀지질 않는다. 한 제조업체의 사장 비서였던 그는 회사 임원들과 함께 회식을 하게 됐다. 2차로 노래방에 갔는데 한 임원이 A 씨를 사장에게 떠밀며 “옆에서 ‘노래방 도우미’ 역할을 좀 하라”고 말했다고 한다. 평소 사장의 통역까지 맡으며 전문성을 갖췄다고 자부했던 A 씨는 “회사 고위층조차 나를 뭘 하는 사람으로 생각하는 걸까 싶어 절망감을 느꼈다”고 말했다.

최근 한국 사회에서 ‘비서’는 어떤 직업보다도 많이 언급되고 있다. 비서는 극단적 선택을 한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성추행 의혹 피해자가 담당했던 직함이다. 피해자 측이 밝힌 서울시장 비서 업무는 다소 충격적이다. ‘심기 보좌’ ‘속옷 전달’ 등등. 전현직 비서들은 박 전 시장과 서울시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입을 모았다. 특히 여성 비서들은 “상사의 심기를 살피며 동시에 아름다움도 갖춰야 한다는 인식이 공공연히 퍼져 있다”고 지적했다.

능력보다 외모부터 주목하는 주변 시선은 그들을 지치게 한다고 했다. 전직 비서 B 씨(30)는 한 대형병원에서 일하던 5년 내내 외모 지적을 끊임없이 받았다. 체중이 늘었다 싶으면 여지없이 “살 빼라”고 했고, 화장을 가볍게 하면 “게으르다”는 소릴 들었다. 한 임원에게 하소연했더니 “네가 어리고 예뻐서 질투하는 것”이라고 했단다.

영화나 드라마 등 대중매체도 이런 왜곡된 시선을 재확산시킨다고 지적했다. 작품에서 여비서들은 ‘딱 달라붙는 짧은 치마’와 ‘하늘하늘한 블라우스’ ‘굽 높은 구두’로 정형화된다. 종종 높은 직급의 상사와 사랑에 빠져 공사를 구분 못 하는 존재로 그려지기도 한다. 현직 비서 C 씨(27)는 “실제로는 평범한 정장을 입고 근무하며 선을 지킨다”면서 “현실과 전혀 다른 얘기”라고 했다.

비서는 단순히 누군가의 기분을 맞춰주는 직업이 아니다. 예쁜 옷 차려입고 미소 짓는 마네킹은 더더욱 아니다. 조직에서 비서의 역할은 누구 못지않게 중요하다. 보좌하는 상사의 업무를 조정하고 회사 내·외부의 커뮤니케이션이 원활하도록 돕는다. 그래서 업무에 대한 전체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최근에는 회계나 통역까지 맡는 전문 비서들이 적지 않다.

“상사가 업무에 집중할 수 있도록 보좌하며 큰 보람을 느낍니다. 자긍심을 가지고 있는 남의 직업을 함부로 재단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C 씨)

비서들은 다른 직업과 똑같이 자신의 일에 사명감과 책임감을 갖고 임하고 있다. 그런 이들이 왜곡된 인식의 벽 앞에서 좌절감을 느껴선 안 된다. 우리 사회가 그동안 엄연히 프로페셔널한 직업인 비서를 그저 ‘사무실의 꽃’으로 여기진 않았는지 돌아봐야 한다. 비서는 결코 남의 속옷을 챙기는 직업이 아니다.
 
김소영 사회부 기자 ksy@donga.com
#비서#직업#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성추행 의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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