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에 포도나무란 것이 있었다. 모든 나무의 목표는 하나다. 자신의 씨앗을 멀리멀리 퍼뜨리는 것.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포도나무는 새들을 이용하기로 했다. 먼저 포도나무는 씨앗을 숨긴 작고 달콤한 열매를 만들었다. 그리고 말했다. “새들아 이리 오렴. 내 너희들이 먹기에 꼭 알맞은 작고 달콤한 열매를 만들었다. 많이 먹고 멀리멀리 지구 저 반대편까지 날아가 똥을 싸주렴!”
이렇게 해서 포도나무는 온 세상으로 퍼져나갔다. 말이 없는 포도나무지만 알 것은 다 안다. 어떻게 하면 새들을 더 쉽게 만날지도 안다. 포도나무의 꿈은 새와의 만남이다. 포도나무는 넝쿨을 만들어 높은 나무에 기대어 더 높이 올라갔다. 그래서 포도나무는 태양을 향해 뻗는 잎들은 햇빛을 좋아하고 뿌리 쪽은 그늘진 것을 좋아하는 성격의 나무가 되었다.
포도나무 지지대로 대나무를 박을 때만 해도 이것이 무슨 사연을 만들까 했다. 레돔이 지지대로 대나무를 박고 싶다고 할 때 이 남자는 왜 이렇게 나를 고달프게 할까 싶었다. 그런데 대나무를 제일 먼저 알아본 것은 새들이었다. 포도나무마다 꽂힌 지지대를 한 자리씩 차지하고 노래를 불렀다. 똥도 쌌다. 나는 불안했지만 레돔은 개의치 않았다. “포도나무 있는 곳에 새들이 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했다. 더구나 새똥에는 미네랄이 엄청 들어 있어서 새 한 마리의 똥이면 포도나무 한 그루에 필요한 미네랄 양으로 충분하다고 했다. 새들은 대나무 꼭대기에 앉아 “이건 내 나무야”, “여긴 내 자리야!” 이렇게 지저귀는 것 같았다.
그런데 대나무가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는 또 다른 것이 나타났다. 바로 개구리였다. 비가 내린 뒤 대나무 꼭대기 속에 물이 차곡하게 고여 있는 걸 어떻게 알고 새끼손가락만 한 개구리가 그 속에 들어가 살기 시작했다. 촉촉한 은신처에 숨었다가 포도나무에 벌레들이 보이면 잽싸게 잡아먹은 뒤 다시 은신처로 돌아간다. 대나무마다 작은 초록색 개구리들이 득시글거리니 이놈들을 잡아먹겠다고 나타난 놈이 있었다. 뱀이었다. 포도밭 바위 옆에 똬리를 틀고 개구리를 사냥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아, 이건 정말 큰일이다!
설상가상 산비둘기까지 산에서 떼를 지어 우리 밭으로 내려왔다. 쓰러진 호밀을 먹기 위해서였다. 처음엔 두어 마리더니 이제는 온 동네 것들을 다 데리고 왔는지 한 스무 마리가 와서 매일 호밀 타작을 해댔다. 그런데 뒤이어 나타난 것이 매였다! 엄청나게 넓은 날개를 펼치고 포도밭 위 하늘을 빙빙 돌고 있었다. 매는 보기 어려운 귀한 새라고 하는데 하늘을 도는 모습은 여유롭고도 위엄이 넘쳤다. 그러다 순식간에 비둘기를 채어갔다. 사람이 없을 때는 근처에서 해치우는지 비둘기 날개가 수북하게 흩어져 있었다. 발치에서 푸드덕거리는 소리가 나 놀라서 보면 대체로 꿩이다. 수안보는 꿩으로 유명한데 길 가다가도 수시로 꿩을 만난다. 꿩은 비둘기보다 많이 느리다. 마지막 순간에 푸드덕거리며 놀란 닭처럼 튀어 오른다. 이 정도면 포도밭이 아니라 잡고 먹히는, 곳곳에 고수들이 숨어 있는 무림의 숲 같다.
그렇다면 포도밭의 최강 고수는 누구일까. 인간? 인간이 나타나는 순간 모든 것이 정지된다. 신나게 타작하던 산비둘기도 날아가고 무서운 뱀도 숨을 죽인다. 풀들도 긴장하고 개구리도 날벌레들도 숨어버린다. 하늘의 제왕 매조차도 빙빙 돌다 사라져버린다. 그 무엇도 인간을 공격해서 잡아먹을 천적은 없다. 인간은 포효한다. 지구 위에서 내가 제일 힘이 세!
그러나 재미있게도 인간의 천적은 인간이다. 알기나 하는지 모르겠다. 안다면 이렇게 자연을 막 대하지는 않겠지. 독한 것들을 땅에도 뿌리고 하늘에도 팍팍 뿌려 좋은 벌레, 나쁜 벌레 다 죽여 버린다. 이 땅에 비가 내리면 독약은 빗물과 사이좋게 섞여서 냇물로 흘러 강물로 가고 그것이 다 우리 입으로 들어온다. 그러니 인간의 천적은 인간 아닌가. 이런 말 하면 바로 욕이 날아온다. “니가 농사가 뭔지 알기나 하냐, 니 포도밭이나 좀 봐라! 아주 난리가 났구나!” 정말 우리 포도밭이 문제다. 어떻게 될지 걱정이 태산이다.
※ 프랑스인 남편 도미니크 에어케(레돔) 씨와 충북 충주에서 사과와 포도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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