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룡 경찰청장 후보자는 20일 국회 인사청문회를 앞두고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성추행 피소 사실을 청와대에 당일 보고한 근거를 묻는 야당 의원의 질의에 서면으로 이렇게 답했다. 김 후보자는 인사청문회에서도 “경찰청에 외부기관 보고를 명시적으로 규정한 규칙은 없다. 향후 외부 보고 관련 사항은 규칙 등을 명확하게 정비하겠다”고 했다.
피해자 A 씨가 8일 오후 4시 30분경 서울지방경찰청에 고소장을 제출하고, 경찰 조사를 받던 당일 오후 7시경 청와대 국정상황실에 관련 내용이 직보(直報)됐다. 박 전 시장은 같은 날 측근들과 대책회의를 했고, 그 다음 날엔 비서실장을 불러 “여성단체가 문제를 제기해 심각하다”고 언급한 뒤 실종됐다. 이 때문에 성추행 의혹의 본질보다 오히려 성추행 사건의 수사 기밀 유출 과정이 더 주목받고 있다.
김 후보자가 언급한 ‘약한 근거’는 정부조직법과 경찰청 훈령인 범죄수사규칙 등 두 가지다. 우선 정부조직법 제11조 제1항은 ‘대통령은 정부의 수반으로서 법령에 따라 모든 중앙행정기관의 장을 지휘·감독한다’고 규정되어 있다. 국정운영 체계에 따라 하급 기관장이 상급 기관인 청와대에 주요 사건을 보고했다는 것이다. 경찰의 업무는 경비와 교통, 정보, 수사 등 다양하다. 관계 기관과의 공동 대처가 필요한 사항을 보고한 것이라면 몰라도 이 조항이 밀행성이 필수인 수사 기밀까지 청와대에 실시간으로 보고하라는 규정이라고 해석하기는 무리다.
그 다음 경찰청이 홈페이지에 공개한 465쪽 분량의 범죄수사규칙을 아무리 뜯어봐도 청와대 보고 조항은 없다. 이 규칙은 주요 수사 정보를 상부에 보고해 신속 정확한 지휘를 받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고, 지휘 보고의 최종 종착지는 경찰청이다.
그런 측면에서 범죄수사규칙은 대검이 검찰 외부인 법무부에도 수사 내용을 보고하도록 하고 있는 법무부령인 검찰보고사무규칙과도 다르다. 검찰보고사무규칙은 전두환 전 대통령 재임 당시인 1981년 12월에 생겼다. 법무부가 검찰로부터 보고받은 수사 정보가 그대로 청와대로 전달돼 정권에 의한 검찰의 통제 수단으로 악용된다는 비판을 받았다. 게다가 문재인 정부의 초대 대통령민정수석비서관을 지낸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은 취임 기자회견에서 “검찰을 지휘하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그 이후 청와대는 검찰 수사 정보를 보고받지 않는다고 밝히고 있다.
경찰은 어떤가. 여전히 매일 수많은 팩스가 청와대 국정상황실로 전송되고, 여기엔 경찰에서 수집한 수사 기밀이 들어있다. 이 수사 기밀이 사정기관의 업무를 총괄하는 민정수석실 산하 반부패비서관실이 아닌 현직 경찰이 파견 중인 국정상황실로 먼저 보고되는 것도 정상적이지 않다. 경찰이 수사 기밀을 관행적으로 청와대에 보고해 구설에 오르거나 결국 지휘부가 형사처벌 받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24일 취임할 예정인 김 후보자는 평소에 법과 규정을 유독 강조한다고 한다. 본인의 소신대로 청와대 보고 관련 규정부터 재정비해야 한다. 무엇보다 집회 시위나 민생 범죄 발생 등 치안 정보는 청와대와 공유하되 수사 기밀은 인사 검증 등 청와대의 요구가 있을 경우에 최소한의 범위 내에서만 보고하도록 해야 한다. 경쟁 수사기관인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검찰 등이 권력으로부터의 독립이라는 국민 요구를 따라가고 있는데, 경찰만 뒤처져서도 안 된다. 검경 수사권 조정으로 위상이 크게 높아진 경찰이 살 길은 청와대에 의존하지 말고, 국민의 편에서 수사해 국민의 신뢰를 더 얻는 것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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