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전 뉴욕에 부임한 첫날 나를 맞아준 것은 맨해튼 브루클린 다리를 지나던 ‘흑인 생명도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 시위대였다. 이들을 따라가 보니 인종차별 반대 시위대가 뉴욕시청 앞에 캠프를 차려놓고 점거 농성을 하고 있었다. 언제까지 시위를 계속할 건지 묻자 한 백인 남성은 “기한이 없다. 우리가 원하는 세상이 올 때까지”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인종차별 문제가 올해 말 미국 대선과 맞물려 오랫동안 이슈가 될 것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그런데 지난주 그곳을 다시 찾으니 농성 천막들은 사라지고 이들이 그려놓은 그라피티 흔적만 군데군데 남아 있었다. 점거가 한 달 이상 이어지며 악취가 생기고 노숙인이 늘어나자 경찰이 기습 철거 작전을 감행한 것이다. 조지 플로이드의 죽음 이후 두 달이나 이어진 분노의 목소리가 이제 좀 잠잠해지나 했지만 이는 오산이었다. 시위의 구심점이 뉴욕의 반대편인 서부로 옮겨가더니 이제는 다시 미국 전역으로 들불처럼 확산될 조짐이다.
그중에서도 요즘 핫스폿으로 떠오른 포틀랜드의 거리 분위기는 마치 전쟁터를 방불케 한다. 특히 시위가 집중되는 법원 건물 앞 일대는 매일 밤마다 사방이 최루탄 가스와 폭발음으로 뒤덮인다. 군복을 입은 중무장 진압요원이 시민을 곤봉으로 후려치고 얼굴에 화학약품을 뿌리는가 하면, 아무런 표지가 없는 차에 태워 어디론가 끌고 간다. 어떤 장면에선 정말 이곳이 ‘2020년의 미국’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원래 포틀랜드는 미국에서 가장 리버럴한 도시 중 하나로 예전부터 ‘시위의 성지(聖地)’로 불렸다. 이곳에서 하도 격렬한 시위가 많이 일어나자 1990년대 초 조지 부시 행정부는 치안이 불안한 중동 레바논의 수도 이름을 따서 ‘리틀 베이루트’라는 별명을 붙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포틀랜드도 불과 보름 전까지는 시위 양상이 그리 과격하지 않았고 경찰과 충돌도 비교적 적은 편이었다. 그랬던 분위기가 갑자기 바뀐 것은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시위대를 ‘폭도’, ‘갱단’으로 규정하고 이곳에 훈련된 연방 요원들을 투입하면서부터다. ‘너희는 법질서의 파괴자, 우리는 수호자’라는 식의 이분법이 이들을 격앙시킨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예전에도 그랬지만 요즘 부쩍 나라의 분열을 조장하며 지지층을 결집시키는 모습을 자주 보이고 있다. 자신에게 반대하는 국민 절반은 적으로 돌리더라도 집토끼만 투표장에 확실히 불러내면 역전승이 가능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백인우월주의 사상을 공공연히 드러내고 각종 반(反)이민 정책을 강행하며 주류 언론을 가짜 뉴스로 매도하는 것 또한 모두 이런 계산에서 나온 행동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게 정치 전략이고 냉혹한 현실이라 해도 요즘 시위 진압 장면을 보고 있으면 ‘미국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는 생각이 절로 들게 된다. 이번 시위 사태는 정치가 국민들의 증오와 복수심을 조장했을 때 나라가 어떻게 멍들어 가는지를 똑똑히 보여주고 있다.
이런 식의 편 가르기와 포퓰리즘은 경제가 어렵고 생활이 고된 곳이라면 어디에서나 나타날 수 있다. 우리 사회도 또 다른 조지 플로이드를 품고 있는 건 아닌지 되돌아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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