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깊어가니 농부가 하는 이야기가 귓등으로 들린다. 맨날 일 이야기, 밭 이야기뿐이다. ‘아아, 나무 이야기 벌레 이야기 정말 듣기 싫다! 제발 다른 이야기를 좀 해봐!’ 나는 그렇게 외치고 싶지만 멍하니 듣는 시늉을 한다. 내가 아니면 누구한테 이야기하겠는가 싶어서 참는다. 어제는 밤새 비가 쏟아지니 벌떡 일어나 밭둑이 무너지지 않을까, 습도 때문에 곰팡이 병이 번지지 않을까, 어떤 약으로 방제해야 할지 잠자는 내 귀에 대고 중얼중얼 거린다. 귀는 열려 있지만 내 마음은 밭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져만 간다.
직장 다닐 때 레돔은 휴가만 기다리고, 오직 휴가 계획을 잡는 낙으로 살았다. 그런데 농부가 되더니 이제는 밭에만 붙어산다. 갔다 오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학교 다녀 온 초등생처럼 이야기한다. 무슨 풀이 얼마나 자랐고, 어떤 벌레가 풀을 얼마나 먹었고, 새들이 똥을 얼마나 누고 갔는지, 멧돼지가 왔는지, 고라니가 싼 똥이 몇 시간 전인지…. 이야기는 끝이 없다. 점심을 먹고 나면 성실한 정찰병처럼 후다닥 밭으로 간다. 그리고 밤이면 땀으로 흠뻑 젖어서 돌아온다. 그리고 또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러니까 아까 벌레 말이야….”
“아아, 그 벌레 이야긴 정말 그만 좀 해줘. 난 그러니까 바다 이야기가 듣고 싶어!” 나의 말에 그는 ‘바다? 그게 뭐지?’ 하는 얼빠진 표정이다. “1년 365일, 그 엄청나게 많은 날들 중에 사흘도 바다를 보기 위해서 떠날 수 없다면 그것을 인생이라고 할 수 있나?” 봄부터 지금까지 쉬지 않고 일했으니 이제 좀 쉬어야 한다고 했더니 레돔은 할 일이 너무 많아서 아무 데도 갈 수 없다고 한다. 봄에 심은 포도나무도 보살펴야 하고, 벌레도 잡아야 하고, 풀도 베야 한다는 것이다. 제일 바쁜 때에 어딜 가느냐고 말한다. 그는 이제 하루라도 벌레와 풀을 보지 않으면 안 되는 밭 중독 농부가 되어버린 모양이다.
그렇다면 나는 혼자라도 가야겠다고 짐을 싸니까 할 수 없이 따라 나선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제주에 갔다. 제주라고 별 재주가 있는 것도 아니다. 덥고 무지하게 습했다. 친구의 집에서 묵었고 성수기 렌터카는 너무 비싸서 빌리지 못했다. 친구의 집 냉장고에는 늙은 오이만 한가득 들어 있었다. 이웃 할머니가 계속 갖다 주는데 늙은 오이는 어떻게 요리해야 하는지 몰라서 이렇게 차곡차곡 쌓여간다는 것이었다. 이 이야기를 하는 중에 이웃 할머니가 커다란 봉지를 들고 문을 두드린다. 설마 또 오이일까, 했는데 또 오이를 들고 오셨다!
일단 오이냉채와 오이김치를 해서 밥을 먹은 뒤 생오이를 가방에 넣어서 바다로 갔다. 찰박거리는 바다에 수영을 하고 나와 돗자리에 앉아서 오이를 먹었다. 친구는 하루 만에 늙은 오이 네 개가 사라졌다고 좋아했다. 다음 날도 너무 덥고 습해서 밖에 나갈 수가 없었다. 집에서 냉장고 안 시원한 오이를 꺼내 냉채를 하고 절임을 해서 비빔밥을 해먹고 놀았다. 그리고 늦은 오후에 오이를 하나 챙겨 바다로 갔다. 수영을 한 뒤 돗자리에 앉아서 오이를 먹었다. 친구는 오늘도 늙은 오이 네 개가 사라졌다고 좋아했다.
세 번째 날에는 레돔이 바다에 왔으니 회를 먹고 싶다고 했다. 요즘에는 한치회가 제철이라고 한다. 반짝거리는 한치회를 한 점 먹으니 파닥파닥 헤엄쳐 다니던 작은 한치의 한때를 떠올리게 했다. 빨리 바다에 가서 헤엄을 치고 싶었다. 한치회를 먹고 나니 한치 물회가 나왔다. 다음엔 한치 부침개도 나왔다. 잡어 조림도 나왔고 마지막엔 성게 미역국에 밥을 말아 먹었다. 우리는 집에 가서 한숨 잔 뒤 냉장고에 있는 오이를 다 꺼내 저녁 바다로 갔다. 그리고 헤엄을 쳤다. 다들 한치처럼 팔다리를 흔들어댔다. 팔랑팔랑 흔들 때마다 모든 근심들이 다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파도가 모든 나쁜 것들을 멀리멀리 데리고 가버리는 것 같았다. 나와서 오이를 먹으니 어느 때보다 시원하고 기분이 좋았다.
이래서 우리는 가끔 바다에 가야 한다. 물론 바다에 갈 때는 늙은 오이를 하나씩 들고 가면 더 좋다는 것은 이번에 덤으로 알게 된 사실이다.
※ 프랑스인 남편 도미니크 에어케(레돔) 씨와 충북 충주에서 사과와 포도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습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