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할머니는 평범한 분이셨다. 그리고 참 좋은 분이셨다.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거친 손바닥으로 내 등을 쓰다듬어 주시며 크지도 작지도 않은 목소리로 내가 잠들 때까지 옛 자장가를 불러주신 외할머니. 하지만 엄할 때는 한없이 무서운 분이셨다. 하루는 친구들과 집에서 뒤주에 있는 쌀을 던지며 장난을 치고 있었는데 외출했다 돌아오신 외할머니께서 그 모습을 보고 화를 내시며 회초리를 드셨다. 난 친구들 앞에서 회초리를 맞아야 했고 그날 밤 외할머니는 내 종아리를 어루만져 주시며 “친구들 앞에서 종아리 때린 건 미안해. 근데, 쌀이나 먹는 음식 가지고 장난하면 절대 안 되는 거야”라며 내가 잠들 때까지 토닥여주셨다.
한번은 한겨울에 사랑방 아궁이에 불을 지폈다. 불 때는 게 너무 재미있던 나머지 장작을 몰래 더 가져와서 아궁이에 넣고 불을 지폈는데 구들장이 너무 뜨거워져서 장판이 다 녹고 이불에 불이 붙어 한밤중에 아궁이에 물을 붓고 불을 끄느라 난리가 난 적이 있었다. 나랑 사촌형은 가족들에게 엄청 혼이 났다. 당연히 외할머니께도 혼날 줄 알았는데 할머니는 차가운 동치미 국물을 주시며 “놀랐지? 이거 마셔. 핼미가 불을 봤어야 하는데 미안하다. 어여 마셔.” 외할머니께 죄송하고 또 감사해서 할머니 품에서 한참을 울었다. 돌아가신 지 오래됐지만 지금도 잠 못 드는 여름밤이면 외할머니 생각이 많이 난다.
‘나도 좋은 할아버지가 될 수 있을까?’ 요즘 나는 이런 고민을 많이 한다. 좋은 할아버지가 되려면 좋은 중년의 삶을 살아야 하는데 중년의 하루하루는 버겁고 힘들기만 하다. 어릴 때는 평범하게 사는 게 참 쉬운 일처럼 보였다. 어른이 되면 아침에 출근하고 저녁에 온 가족이 모여 앉아 텔레비전을 보며 저녁을 먹고, 자식이 대학 시험 보러 갈 때 가슴 졸이며 기도하고, 자식 군대 보내며 눈물 글썽이고, 군에서 첫 휴가 나온 날이면 다 같이 둘러앉아 삼겹살을 구워 먹고, 큰딸 시집가는 날 서운한 마음에 새벽까지 베갯잇을 적시고, 손주 보면 또 그 마음이 풀어지고, 그렇게 살다 보면 저절로 할아버지가 되는 줄 알았다.
아니다. 정말 최선을 다해 멀쩡하게 살아야 겨우 아저씨가 되고, 상처 난 자리에 굳은살이 생길 정도로 세상사에 덤덤해지고, 평소보다 더 많이 양보하고, 주변의 궂은일도 챙겨주고, 사랑하는 사람, 소중한 사람도 먼저 하늘나라로 보내 보고, 모난 성격, 모난 심보 다 둥글둥글해져야, 비로소 할아버지가 될 수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좋은 할아버지가 된다는 건, 그보다 수십 배는 더 단단해져야 가능한 일이다.
나는 ‘좋은 할아버지’ 아니, 그냥 평범한 할아버지라도 될 수 있을까? 똑똑한 할아버지 말고 지혜로운 할아버지, 자기주장이 강하고 자기 얘기만 하는 할아버지 말고, 상대방 얘기를 더 많이 들어주시는 할아버지. 내가 힘들다고 하면 “사내놈이 왜 그렇게 나약하냐”고 다그치는 할아버지 말고, 그냥 등을 쓰다듬어 주시는 할아버지. 정치 얘기나 전쟁 얘기 말고, 구수한 옛날이야기를 더 재밌게 해주시는 할아버지. 충고보다는 격려를 해주시고, 돈 잘 버는 법보다는, 개울에서 물고기 잡는 법을 알려주시는 할아버지, 그런 할아버지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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