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갑을 관계[정도언의 마음의 지도]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8월 5일 03시 00분


일러스트레이션 김충민 기자 kcm0514@donga.com
일러스트레이션 김충민 기자 kcm0514@donga.com
정도언 정신분석가·서울대 명예교수
정도언 정신분석가·서울대 명예교수
언젠가 제가 모시고 일하던 분이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자네는 왜 그렇게 생각이 복잡한가!” 그 순간 저는 정말 제 생각이 복잡한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를 벗어나 방으로 와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생각이 복잡한 사람은 제가 아닌, 제 생각이 복잡하다고 한 바로 그분이었습니다. 당시 그분은 할 일을 미루고 계셨고, 그 점에 관해 그날 그 자리에서 제가 말씀드렸으며, 제 말을 듣고서 그분의 생각이 복잡해진 겁니다. 그런데 왜 저는 잠시나마 제 생각이 오히려 복잡하다고 느꼈을까요?

누가 그렇게 강요하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제 생각이 복잡하다고 느낀 것은 제가 그분이 던진 말을 덥석 받아서 그 말의 내용과 동일화를 했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제게 말을 던진 행위는 투사(投射)이고, 제가 그 말을 받아 동일화를 해서 마치 제 생각이 복잡한 것처럼 느꼈기에 이를 정신분석학에서는 투사적 동일화가 작동했다고 풀이합니다. 그분의 말에 관해 제가 동일화라는 심리기제를 거치지 않았다면 단순히 투사로 끝났을 겁니다. 그랬다면 저는 “별 이상한 말씀을 다 하시네. 원래 좀 그러시기는 하지”라며 신경 쓰지 않고 넘어갔을 겁니다.

그렇다면 그분은 왜 그러셨을까요? 아마도 그날 그 자리에서 제가 드렸던 말씀이 불편하셨을 겁니다. 사람들은 불편한 말을 들으면 받아들이기보다는 밖으로 내보내려고 합니다. 마치 입맛에 안 맞는 음식이 입에 들어오면 뱉어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불편한 말 중에서도 왠지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할 것 같은 일과 연관이 있다면 가장 쉬운 방법은 상대방의 책임으로 돌리는 겁니다. 내 허물이나 책임인 줄 알아도 남에게 떠넘기면 속이 시원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뒤집어쓰는 입장에서는 억울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니 평소 미워하던 대상에게 뒤집어씌울 수 있다면 기쁨은 두 배로 늘어납니다.

‘뒤집어씌우기’라는 일상용어를 정신분석학에서 쓰는 어려운 말로 바꾸면 투사입니다. 투사는 자신 안의 것을 밖으로 던지는 것입니다. 스스로 인정하고 싶지 않은 감정, 욕망을 남에게 뒤집어씌워서 자신을 정당화하는 마음의 작용으로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하는 경우가 대다수입니다. 영양분이 되거나 맛있는 음식은 안으로 받아들이고 해가 되는 것은 밖으로 뱉어 내는 것처럼 마음도 같은 식으로 움직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투사 역시 밖으로, 상대에게 던지는 것이니 그 내용은 당연히 나쁜 것입니다.

투사의 세계에도 등급이 있습니다. 자신이 책임지기 싫어서 남 탓을 하는 정도는 보통 정도의 등급에 속합니다. 이와 비교해 위에서 제 경험을 빌려서 예를 든 투사적 동일화는 상당히 복잡한 차원에서 작동하는 투사 행위입니다. 전문가인 저도 늘 머리 아프게 느끼는 이 용어는 클라인 학파의 창시자이며 어린아이들 분석의 개척자이고 프로이트의 무의식을 환상으로 대치해 마음의 움직임을 연구했던 멜라니 클라인이 도입했습니다. 환상 속에서 내가 가진 것의 일부나 전부를 상대방을 통제하거나, 소유하거나, 해치려고 하는 목적으로 그 사람에게 들여보내는 심리적 행위를 말합니다. 비록 무의식적으로 일어나지만 투사적 동일화는 대단히 적극적인 심리적 공격 행위입니다. 단순히 상대에게 흉기를 투척하는 것을 투사라고 한다면, 투사적 동일화의 대상이 되는 사람은 자신에게 던져진 흉기를 스스로 집어서 자해를 하게 됩니다. 투사보다 더 심하게 마음의 상처를 입습니다.

세상이 돌아가는 형세를 자세히 살펴보면 투사를 주된 무기로 써서 자신의 허물이나 책임을 남에게 돌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 세상은 좋은 세상도, 물려주고 싶은 세상도, 지속 가능한 세상도 아닙니다. 그중 정말 고수들은 투사적 동일화라는 심리적 기제를 정말 능숙하게 구사해서 저를 깜짝 놀라게 합니다. 마음을 잘 다스리고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마치 그들의 잘못이 내 잘못인 것 같은 착각과 혼돈에 빠지게 만드니 그 솜씨에 정말 경탄할 수밖에 없습니다.

도움이 될까 해서 약간의 지침을 드립니다. 상대방이 내게 책임을 묻는 상황을 가정해 봅니다. 일단 상대방이 나를 비난하며 책임을 묻는 말 자체가 그럴듯하게 들릴수록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심호흡을 세 번 합니다. 그리고 느낌에 휘둘리지 말고 냉철하게 생각을 해야만 합니다. 내가 그 사람에게 같은 말을 던졌을 때 그 역시 그럴듯하게 들린다면 내가 아니고, 그 사람이 져야 할 책임을 내게 던졌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다음 단계에서는 객관적인 자료와 사실을 동원해서 누구의 책임인지 가려내는 논리를 제대로 세워야 합니다. 투사나 투사적 동일화를 즐기며 쓰는 사람들은 자신이 오랫동안 개발하고 현장에 적용해 온 독특하고 교묘한 논리로 무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경쟁력 있는 논리 체계를 제대로 세우지 않으면 순발력 있게 대항하며 곤경에서 빠져나가기가 어렵습니다. 그런 식으로 흘러간다면 ‘마음의 갑을 관계’가 정착되면서 계속 상대방에게 시달리는 고초를 겪게 됩니다. 그러기 전에 바로잡아야 합니다.

정도언 정신분석가·서울대 명예교수
#갑을 관계#마음#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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