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현장을 가다]
톈안먼 사태 이후 애국교육 강화… 20년 이상 교육성과 지금 나타나
‘민족+애국’→‘中이중성’으로 발현
지난달 말 중국 베이징 차오양(朝陽)구의 대형 휴대전화 매장을 찾았다. 수백 개의 최신 스마트폰이 즐비했지만 미국 애플의 아이폰과 한국 삼성의 갤럭시는 진열대에 없었다. 두 제품을 찾는 고객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매장 직원에게 “왜 아이폰과 갤럭시가 없느냐”고 물었다. 그는 “제품은 갖고 있지만 따로 진열해 놓지는 않는다. 특히 애플 제품은 더더욱 그렇다”면서 “누가 시킨 것은 아니지만 눈치를 보게 된다”고 답했다. 미중 갈등의 여파를 생생하게 확인한 순간이었다.
○ “외제 쓰면 매국노” 애국 소비 열풍
최근 중국에서는 ‘궈차오(國潮)’ 마케팅이 한창이다. 궈차오는 중국 전통문화를 의미하는 ‘궈(國)’와 유행을 뜻하는 ‘차오(潮)’를 합한 단어로 중국 제품을 사용하자는 운동이다. 미중 갈등이 격화된 후 젊은 세대가 이 같은 ‘애국 소비’를 주도하는 현상이 뚜렷하다. 특히 각각 1990년대와 2000년대 출생자를 뜻하는 ‘주링허우’, ‘링링허우’ 세대가 그 중심에 있다. 이들은 웨이보 같은 소셜미디어를 통해 “외국 제품을 쓰는 사람은 매국노”, “중국 제품을 쓰지 않는 사람은 중국인이 아니다” 같은 자극적 문구를 게재하며 국산품 사용을 촉구하고 있다.
이들의 힘은 중국 최대 통신업체 화웨이를 세계 1등으로 만드는 데에도 기여했다. 시장조사업체 카운터포인트리서치에 따르면 화웨이는 올해 2분기(4∼6월) 세계 스마트폰 시장에서 5480만 대를 출하해 그간 독보적 1위였던 삼성전자(5420만 대)를 제치고 사상 처음 1위를 차지했다. 2분기 화웨이의 세계 시장 판매량은 지난해 2분기보다 3% 줄었다. 하지만 중국 시장에서는 11% 증가했다. 지난해 5월 미국이 화웨이 제재를 시작한 후 화웨이가 미중 무역 전쟁의 최전선에 자리하면서 중국인들 사이에서 화웨이 제품을 쓰자는 분위기가 확산된 것이 큰 역할을 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5월 중국 관영 중국중앙(CC)TV의 간판 앵커 주광취안(朱廣權)이 소셜미디어 인플루언서인 리자치(李佳琦)와 함께 진행한 국산품 판매 온라인 라이브 방송에는 무려 950만 명이 동시 접속했다. ‘중국 브랜드의 날(中國品牌日)’을 기념하기 위해 CCTV가 기획한 방송인데, 이날 소개된 머리빗은 불과 2초 만에 1만3000개가 팔리기도 했다. 정보기술(IT) 전문매체 칸차이왕은 “중국 문화에 높은 자부심을 지닌 1995∼2004년생들이 최근의 국산품 소비를 주도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 틱톡 창업자에 과도한 비난, 불매 운동도
미중 갈등의 새로운 전선으로 부상한 소셜미디어 틱톡의 장이밍(張一鳴·37) 창업자는 중국 누리꾼의 격렬한 비판을 받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 행정부의 압박에 쉽게 굴복해 미국 사업을 접으려 했고, 중국의 체면과 위신을 손상시켰다는 이유에서다. 누리꾼들은 이달 3일 장 창업자가 직원들에게 틱톡 매각에 대한 입장을 밝히자 “틱톡의 모기업 바이트댄스는 이미 외국 기업이다. 중국을 떠나라”고 비판하고 있다.
이들은 런정페이(任正非·75) 화웨이 창업자를 예로 들며 장 창업자를 ‘미국에 굴복한 자’로 폄훼하고 있다. 런 창업자는 딸인 멍완저우(孟晩舟·48) 화웨이 최고재무책임자(CFO)가 미국의 요청으로 2018년 12월부터 캐나다 밴쿠버에 구금됐는데도 미국에 굴복하지 않았는데, 장 창업자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장 창업자의 이름에 해외로 떠나라는 뜻의 ‘이민’을 넣어 ‘장이민(張移民)’으로 조롱하는 사람도 있다.
일부는 아예 뉴스 앱 진르터우탸오(今日頭條)를 비롯해 바이트댄스 산하의 주요 앱을 모두 불매하자는 의견을 내놓고 있다. 미국에 쉽게 무릎을 꿇는 회사를 두고 볼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 “중국은 과거의 중국이 아니다”
중국의 애국주의 열풍은 소비뿐 아니라 정치 사회적 측면에서도 전방위로 나타나고 있다. 대표적 사건이 지난달 27일 쓰촨(四川)성 청두(成都) 주재 미국총영사관 폐쇄다. 같은 달 24일 미국이 텍사스주 휴스턴 주재 중국총영사관을 폐쇄하면서 중국 역시 맞불 조치를 택했지만 양국 국민의 반응은 첨예하게 달랐다.
휴스턴 중국총영사관 폐쇄 당시 현장에서는 일반 미국인을 거의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러나 청두 미총영사관 앞에는 7월 24일부터 대사관 폐쇄를 요구하는 일반 중국인들이 몰려 야유를 퍼붓고 오성홍기를 흔들며 미국을 규탄했다. 중국 최남단 하이난(海南)에서 자발적으로 달려온 사람까지 있을 정도로 수천 명의 중국인이 모여들었다. 상당수는 미국을 비난하는 문구가 새겨진 옷을 입었고 미국 국기나 트럼프 미 대통령,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 등의 얼굴이 그려진 물건을 훼손했다. 일부는 ‘사랑해 중국’이라는 노래를 불렀고, 폭죽을 터뜨렸다 체포된 사람도 있었다.
관영매체는 이런 움직임을 사실상 부추겼다. CCTV는 지난달 23일 중국이 첫 화성 탐사선을 발사한 역사적 순간에도 생중계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청두 미총영사관 폐쇄 과정은 실시간으로 온라인 생중계했다. CCTV 웨이보 계정에서 청두 미총영사관의 성조기가 내려가는 장면을 본 시청자만 1500만 명이 넘는다.
중국 소셜미디어에는 “1999년 유고슬라비아 베오그라드 중국대사관이 나토의 오폭을 당했을 때는 전 인민이 눈물을 흘렸지만 이번에는 모두가 스마트폰을 들고 웃으면서 청두 미총영사관 폐쇄를 지켜봤다”, “중국은 과거의 중국이 아니다. 시대가 달라졌다” 같은 글이 넘쳐난다.
○ 톈안먼 사태 후 ‘애국 교육’ 고수
젊은층의 이런 태도는 1989년 톈안먼 민주화 시위 후 애국주의 교육을 강화한 중국 공산당의 행보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1978년 개혁개방을 시작한 중국은 이후 ‘애국주의’ 교육을 잠시 완화했다. 그러나 ‘톈안먼 사태’ 이후 깜짝 놀란 중국 공산당은 1994년부터 모든 초등학교 교과서에 애국을 강조하는 내용을 담도록 지시했고, 모든 언론이 일정 횟수 이상의 애국주의 고취 영상을 내보내도록 강제했다. 이후 26년이 지난 지금 이런 애국주의 교육에 사실상 세뇌당하다시피 한 젊은층이 미국 등 외세에 대해 극한의 적개심을 드러내고, 중화주의 사상을 강조한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이런 유별난 중국 애국주의가 외국인에게 불편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서양에 대해서는 늘 ‘피해자’를 자처하면서도 약소국에는 ‘강자’로 군림하는 이중성 때문이다. 중국은 아편전쟁 패배로 1842년부터 155년간 홍콩을 할양하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제국주의에 희생됐다는 점을 과도하리만큼 강조한다.
홍콩 문제에 대한 서방의 비판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것도 “그간 우리가 서방과 제국주의자들에게 당한 게 워낙 많으니 당신들은 간섭할 자격이 없다”는 정서에 기반한다. 하지만 동남아 각국 등에는 “중국의 수천 년 역사에서 너희는 늘 우리에게 조공을 바치는 나라였다”는 심리를 무의식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영국 맨체스터대에서 중국 정치학을 가르치는 피터 그리스 교수는 “중국에서 애국주의와 민족주의가 결합해 강자에는 약하게, 약자에는 강하게 대하는 이중성이 나타나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 애국 영화 등 선전전 강화
중국 지도부는 과거부터 국내외적으로 큰 사건이 발생했을 때 민심 수습을 위해 애국의식을 고취한 일종의 선전 영화를 만들어왔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과 미중 갈등이란 위기를 맞은 올해 역시 이런 움직임이 눈에 띈다. 지난해에도 중화인민공화국 창립 70주년을 맞아 제작된 애국 영화 ‘나와 나의 조국’이 개봉했다. 이 작품은 1000억 원이 넘는 수입을 거두며 대대적인 흥행 몰이를 했다.
지난달 유명 영화 제작사 보나픽처스와 류웨이창(劉偉强) 감독은 중국의 코로나19가 창궐한 현장에서 헌신한 의사들의 이야기를 다룬 ‘중국 의사’를 2021년 개봉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공산당의 지도 아래 모두가 합심해 코로나19와 싸우는 이야기가 주제다.
코로나19 발원지 논쟁 때 미국을 비난해 주목을 받은 바이러스 전문가 중난산(鐘南山) 중국 공정원 원사는 “중국 밖의 일부 사람들이 중국의 코로나19에 대해 오해를 하면서 이를 정치화하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라며 “이 영화가 사실을 알리고 진정한 감동을 주기를 바란다”며 미국을 정면으로 겨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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