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를 그리는 일과 물을 그리는 일은 다르다. 명멸하는 마음의 진동과 그 마음의 뼈를 그리는 일이 다르듯이. 동아시아의 회화사에는 파도에 집착해 온 전통이 있다. 1825년에 목판화 연작으로 간행되어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가쓰시카 호쿠사이(1760∼1849)의 ‘가나가와 해변의 높은 파도’는 누구나 한 번쯤 보았을 유명한 그림이다. 호쿠사이 이전에도 이케노 다이가(池大雅·1723∼1776)는 ‘오강대관(吳江大觀)’이라는 걸작을 남겼다. 그 이전에는 남송(南宋)대의 화가 마원(馬遠)의 ‘십이수도(十二水圖)’가 있었고, 바로 얼마 전에는 정용국의 ‘플로우(flow)’ 연작 전시가 열렸다. 왕가위 감독의 ‘동사서독(東邪西毒)’을 이 긴 파도의 연대기에 위치시킬 수 있다. ‘동사서독’은 무협영화이지만, 주인공은 칼이 아니라 파도이다. ‘동사서독’의 스크린은 마음의 파도를 전시하는 공간이다.
‘동사서독’에는 절세 무공을 가진 미남미녀 검객들이 나와 끊임없이 싸우고 번민한다. 이들은 사랑하되 가정을 꾸리지 않으며, 사랑하는 이로부터 버림받아 절세의 검객이 되고, 검객이면서도 운을 맞추어 말을 하고, 죽을 줄 알면서도 기꺼이 중과부적(衆寡不敵)의 싸움에 뛰어든다. 주변에 고수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겨루어 보아야 성이 풀리고, 집을 떠날 때 가재도구를 챙기기보다는 불을 놓고 그 화염을 응시한다. 바람이 세게 불면 가던 발걸음을 돌려서라도 바람을 마주하고 길을 가는 이들, 그들의 칼이 한 합 그어지면 산은 신음하며 내려앉고 물은 소스라쳐 뛰어오른다.
이들은 목숨에 연연하지는 않되 기억에는 연연한다. 몸은 과감히 떠나건만 마음은 떠나온 곳에 여전히 머물러 있다. 사랑에 매우 민감하고, 자존심이 강하며, 쉽게 상처받는다.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그 상처받은 마음이다. 그 상처는 기억의 형태로 존재하여 그들의 가장 약한 고리가 된다. 그 상처를 치유하는 유일한 약은 ‘취생몽사(醉生夢死)’라는 이름을 가진 술이다. 그들은 술에 취해 다음과 같은 대사를 나직하게 읊조린다.
“난 이겼다고 생각해 왔어요. 그러던 어느 날 거울을 보고 졌다는 걸 깨달았어요.” “검이 빠르면 피가 솟을 때 바람 소리처럼 듣기 좋다던데, 내 피로 그 소리를 듣게 될 줄이야.” “내가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에는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없었죠.” “좌절하면 자기변명을 늘어놓게 된다.” “번뇌가 많은 까닭은 기억력 때문이다. 그해부터 난 많은 일을 잊고 복사꽃을 좋아한 것만 기억했다.” “잊으려고 노력할수록 더 생각이 난다.” “거짓말이라도 해주세요. ‘당신은 내 사랑이 아니야’라고 말하지는 마세요.” “당신이 그 여자를 사랑한다기에 죽이려고 했지만 관뒀어요. 그 여자를 사랑한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어서요.”
이게 다 무엇인가. 마음의 파도이다. 영화는 화면 가득히 일렁이는 파도를 보여주며, 선사 혜능(慧能·638∼713)의 비풍비번(非風非幡)의 자막을 띄운다. 바람이 불어 깃발이 나부끼자, 바람으로 인해 깃발이 움직이는지, 아니면 깃발 스스로 움직이는지에 대해 승려들이 논란을 벌였다. 이때 4년 은둔 끝에 나타난 선승 혜능이 말했다.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다. 마음이 스스로 움직이는 것이다.” 마음이 정착하지 못하고 번뇌에 흔들리는 것이 불교만의 주제일까. “가질 수는 없어도 잊지는 말아야 한다”는 대사는 ‘생은 다른 곳에’라는 밀란 쿤데라의 말을 번안한 것이며, 그 말은 다시 랭보의 ‘진정한 삶은 여기에 없다’는 말의 번안일 수 있다고 평론가 황현산은 말한 적이 있다.
이처럼 ‘동사서독’은 실로 유심론(唯心論)인데, 그 유심론의 세계에서 극단의 칼부림이 일어난다. 이 역설이 바로 ‘동사서독’이다. 이 화려하고 덧없는 세계가 결국 마음의 파도에 불과함을 영화도 알고, 주인공도 알고, 관객도 알건만 아무도 해탈하지 않는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