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같이 무덥고 습한 여름날은 잠들기가 쉽지 않다. 조선시대라고 달랐을까. 조선의 왕궁 사람들도 불면증에 시달렸지만 그들에게는 귀비탕(歸脾湯)이라는 탈출구가 있었다. 귀비탕은 정신을 안정시키며 비위(脾胃)를 든든하게 하는 보약으로 신경쇠약, 불면증, 건망증의 치료에 쓰는 처방이다. 조선 19대 왕 숙종도 귀비탕으로 말년의 불면증을 다스렸다. 어의들은 노환을 앓고 있던 숙종의 불면증과 체력 고갈 증상을 해결하기 위해 갖은 처방을 다 썼다. 숙종이 쓰디쓴 한약을 더 이상 먹기 싫다며 거부하자 영의정 김창집은 달콤한 귀비탕을 대안으로 들고나왔다. 숙종은 귀비탕을 먹고 나서야 제대로 잘 수 있었다.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귀비탕은 왕비들이 특히 많이 복용했다. 사도세자의 부인이자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惠慶宮) 홍씨도 불면증 치료를 위해 귀비탕을 복용했다. 정조 13년 의관들은 혜경궁을 진찰한 후 “잠을 편안히 이루지 못하시는 것은 필시 격기(膈氣)와 담증(痰症) 때문입니다. 귀비탕에 담증을 완화시키는 약제를 더해 복용하면 좋겠습니다”고 말한다.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혜경궁의 귀비탕 복용 기록은 정조 때만 54회, 순조 때 20여 회에 이른다. 기록되지 않은 비공식 복용 횟수는 더 많았을 터.
혜경궁의 불면증은 심적인 고통에서 비롯됐을 가능성이 크다. 정조 일성록에는 “혜경궁께서는 가을과 겨울에는 몸과 마음이 항상 불편하시고, 심회(心懷)는 언제나 좋지 않으시다”는 기록이 있다. 혜경궁의 한중록(閑中錄)에도 잘 나와 있지만 그의 삶은 파란만장했다. 남편 사도세자의 죽음과 정조의 즉위 과정, 친정 문제 등으로 극심한 심적 고통 속에 살았다.
역사에서 귀비탕을 복용한 기록을 찾아보면 유독 왕비들이 많다. 인조의 계비였던 장렬왕후는 20첩, 30첩씩 연속적으로 이 탕을 복용한 기록이 나온다. 장렬왕후는 후궁 조소용의 이간질 때문에 외진 방에 내쳐져 독수공방하는 대목이 나온다. 그 좌절과 원망으로 생긴 신경쇠약증을 달래준 처방이 바로 귀비탕이었다.
조선 후기 왕비들의 심적 고통이 얼마나 심했는지는 출산 기록으로 짐작할 수 있다. 숙종에서 순조까지 9명의 왕비 중 인경왕후의 2녀와 순원왕후의 2남 3녀를 제외하고는 정실 왕비의 출산 기록이 전혀 없다. 심적 압박감 때문에 출산력이 극도로 낮아졌음을 보여준다. 영조의 후견인 역할을 했던 인원왕후나 정순왕후, 가순궁, 순원왕후에 이르기까지 대부분 왕비들은 심적 고통에 따른 신경쇠약증을 귀비탕으로 달랬다.
송나라 때의 의서인 ‘제생방’에는 귀비탕을 이렇게 정의한다. ‘일에 대한 근심이 지나쳐 건망증이나 가슴이 두근거리며 병이 되는 것을 치료한다.’ 최근 연구에서 귀비탕에 들어가는 약재인 원지(遠志)가 헥소바비탈이라는 성분 때문에 수면을 연장시키는 작용이 있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귀비탕에 들어가는 또 다른 약재인 용안육이나 산조인 또한 한방의 전통적 수면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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