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주년 광복절 경축사를 통해 문재인 대통령은 일본 측에 강온 메시지를 모두 던졌다. 개인의 ‘불법행위 배상청구권’이 소멸되지 않았다는 한국 대법원의 판결을 정면으로 내세우면서 “한국 정부는 언제든 일본 정부와 마주앉을 준비가 돼 있다”고도 했다. 게다가 ‘사법부의 판단을 존중하면서 피해자가 동의할 수 있는 원만한 해결책’에 대해 협의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징용공(강제징용 노동자) 문제 해결은 쉽지 않다. 한국 정부는 ‘삼권분립’을 내세워 행정부가 사법부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것을 정당화했지만, 일본 정부는 한국 사법부와 행정부가 연계해 한일 청구권협정을 무산시키는 것을 경계해 왔다. 한일 청구권협정이라는 ‘1965년 체제’의 핵심 부분이 침해됐다고 생각하면 주한 일본대사 소환을 포함해 모든 대항 수단(보복조치)을 취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한국 측도 대항 조치를 취해 한일관계는 최악의 상태에 빠진다.
징용 문제는 사법문제로 쟁점화되면서 매우 해결하기 어려워졌다. 게다가 일본 정부는 이를 수출관리 문제와 정치적으로 연계해 반격했다. 이중으로 꼬이면서 현재 협상 자체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한일 양국 중 어느 한쪽만 크게 양보하는 해결책은 있을 수 없기에 쌍방이 스스로 한발 물러서서 어떤 지혜 혹은 편법을 발견하는 길밖에 없다.
동북아를 중심으로 파국 후 외교를 한번 생각해보자. 사태의 심각성을 다시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한일의 외교 파국은 미국 대통령 선거 이후, 즉 세계 정치의 재편기에 진행된다. 다시 말해 한일은 공통의 전략도, 외교정책도 없이 새로운 시대에 개별적으로 대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니, 오히려 서로 상대방의 발목을 잡을지도 모른다.
한일 양국이 직면해야 할 사안은 미중 대립이 ‘체제 경쟁’으로 바뀌는 심각한 사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재선되든, 조 바이든 민주당 후보가 당선되든 그 방향은 같을 것이다. 미소 냉전과 같은 군사적 패권 투쟁은 아니라 해도, 기술이나 시장의 전략 부문에서 미중 디커플링(분리)이 진행되고, 동맹국에 두 국가 중 하나에 대한 선택이 강요될 것 같다.
그 징후는 이미 정보기술(IT) 첨단 분야에서 구체화했다. 이달 13일 트럼프 미 행정부는 중국 통신업체 화웨이와 ZTE 등의 제품과 서비스를 이용하는 기업을 미 정부기관의 거래 금지 목록에 올렸다. 동맹국에도 중국 IT 기기 및 서비스를 금지시키려 하고 있다. 중국은 한국과 대만으로부터 반도체 수입을 급격히 늘리고 있다. 이 분야가 최초의 전쟁터가 될 수 있으므로 한국 기업 역시 사태의 심각성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을 것이다.
문재인 정부가 깊은 관심을 갖고 있는 북-미 협상이나 남북대화도 순조롭게 진전되리라 보기 어렵다. 김여정 북한 노동당 제1부부장의 최근 담화가 보여주듯 북한은 1, 2차 북-미 정상회담이 성공했다고 보지 않는다. 즉 트럼프 대통령이 재선되더라도 사전에 ‘미국의 중대한 태도 변화(단계적 비핵화 용인)’를 확인한 후가 아니면 다음 정상회담을 개최할 수 없다. 회담을 강행하다 또 실패하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위신이 회복할 수 없을 만큼 실추될 것이다.
바이든 후보가 대통령으로 뽑히면 당연히 대북정책의 전면적 재검토가 시도될 것이다. 버락 오바마 전 행정부 시절의 ‘전략적 인내’로 회귀하지 않더라도 북한에 대한 관여 정책이 더 주의 깊게 바뀔 것으로 봐야 한다. 그러면 북측의 협상 의욕도 더욱 줄어들 것이다. 북-미 관계에 진전이 없으면 북한은 남북대화의 의욕을 잃고, 대중 의존을 늘리는 길을 선택할지 모른다.
문 대통령이 최대한의 대북 유화를 시도해도 김 위원장은 자력갱생을 견지하며 경제적인 대남 의존을 최소화하려 할 것이다. 장기적으로 볼 때 경제적 대남 의존이야말로 북한이 가장 경계하는 사태이기 때문이다. 한국이 중국을 통해 대북정책을 모색할 수도 있지만, 앞서 언급한 미중 디커플링 문제와 관련해 미국을 강하게 자극할 것이다.
한국과 일본은 기본적인 목표와 이익을 공유하는 선진 ‘미들파워’다. 미중 대립을 전제로 하면 이 틈에 있는 양국이 외교 전략을 공유하는 일이 당연하다. 역사 인식, 민족주의, 리더십 대립이 있더라도 이를 최소한으로 억제해야 한다. 11월을 목표로 추진되고 있는 한중일 정상회의(한국 개최)가 마지막 기회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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