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세계 음악계에서는 다니엘 에크가 화제다. 가루가 되도록 입방아에 오르고 있다. 세계 최대 음원 서비스 플랫폼인 스포티파이의 최고경영자(CEO) 말이다. 이달 초 어떤 인터뷰에서 그가 “음악가들이 3, 4년에 한 번씩 신작을 내면서 그걸로 족하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는 취지로 말한 것이 논란이 됐다. 매일 수많은 신곡이 쏟아져야 운영이 잘되는 부유한 플랫폼 사업자의 관점에서 예술의 가치를 일차원적으로 재단했다는 이유에서다.
미국 음악평론가 스티븐 하이든은 “거머리가 숙주 보고 충분한 피를 좀 생산하라며 호통 치는 격”이라고, 영국 일간 가디언은 ‘황금알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자는 꼴’이라고 비판했다. 스포티파이가 음악가들에게 배분하는 수익은 적은 반면 스스로는 어마어마한 부를 쌓고 있다는 비판이 안 그래도 수년째 음악계에 제기돼온 터. CEO가 기름을 부은 것이다.
#1. 스포티파이는 숫자의 플랫폼이다. 아티스트별로 한 달간 청취 횟수를 1단위까지 보여준다. 앨범, 노래, 음악가를 숫자(와 수익)로 판단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매우 자연스러운 일일 수 있다. 이를테면 스포티파이에서 아일랜드 음악가 데이미언 라이스 페이지에 들어가면 라이스의 사진 아래 ‘월별 청취자 277만3012명’이라는 숫자가 먼저 소비자를 반긴다.
#2. 물론 정확한 통계는 음악가와 관계자들에게 귀한 정보도 된다. 따라서 음악계의 분노는 차라리 거대 산업 시스템의 거대한 무감각에 대한 경악에 더 가까울 것이다. 수치로 따질 수 없는 예술의 가치에 관한, 그리고 계량할 수 없는 예술 창작에 대한 무지를 향한 공포…. 에크의 관점에서 보면 2014년 3집을 낸 뒤 6년 만에 달랑 싱글 하나를 낸 라이스는 게으른 음악 노동자의 표상, 비판받아 마땅한 ‘납품업자’다.
#3. 23일 별세한 국내 1세대 재즈 보컬 박성연 씨는 40여 년간 단 세 장의 앨범을 냈다. 누군가는 ‘겨우 3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 흔한 디지털 싱글이나 EP(미니앨범)도 없으니…. 그나마 1집(1985년)은 ‘박성연’이 아니라 ‘박성연과 Jazz At The Janus’의 이름으로 냈다. 그렇다. 그는 국내 최초의 토종 재즈 라이브 클럽 ‘야누스’(현 ‘디바 야누스’)의 창립자이자 운영자였다. 근 30년간 적자에 허덕이면서도 재즈 클럽 야누스를 지킨 고 박성연 씨의 노고는 과연 숫자로 계량할 수 있을까.
#5. 박 선생은 한국 재즈의 대모다. 그가 1978년 문 연 야누스는 한국 재즈 1세대를 배양한 토양이 됐다. 한국 재즈 연주자들은 재즈 자체의 발전은 차치하고라도 대중가요에 고급스러운 연주를 제공하는 장인의 역할도 했다. 야누스는 한국 대중음악의 질을 한 차원 높인 비밀의 정원이었고, 박 선생은 숨은 정원사였던 셈이다.
#6. 정원사는 큰 영광을 누리지 못했다. 당신 역시 미8군에서 재즈를 배웠지만 동료 가수들이 가요계로 나아가 성공을 거두는 동안 야누스 운영난에 허덕이며 가난한 배를 솔(soul)로 가득 채웠을 뿐이다. 병환으로 요양병원에 들어가며 클럽을 후배에게 맡겨 둔 뒤, 말년에는 오랜 신장투석으로 심신이 시달리면서도 기회가 될 때마다 마이크를 잡았다.
“괜찮다. 이 모든 것(어려움)이 내 블루스를 더 깊게 만들어줄 테니까.”(2010년 다큐멘터리 영화 ‘브라보! 재즈 라이프’ 중)
#7. ‘산다는 건 신비한 축복, 분명한 이유가 있어’(‘바람이 부네요’ 중)
이 곡을 지어 박 선생에게 헌정한 피아니스트 임인건은 몇 년 전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누군가는 재즈의 고향은 미국 뉴올리언스라고 하겠죠. 요즘 젊은 연주자들은 보스턴의 버클리음대에서 재즈를 배워서 와요. 하지만 누군가 제게 대한민국 재즈의 고향이 어딘지를 물어본다면 야누스라고 답할 거예요.”
#8. 스포티파이가 곧 국내에 정식 서비스를 시작한다. 며칠 전부터 메뉴 일부를 한국어로 표시하기 시작했다. 케이팝과 각종 가요 음원 다수는 이미 몇 해 전부터 이 플랫폼에서 서비스가 되고 있다. 박성연 씨의 항목은 아직 없다. 그를 숫자로 표시한다면 최소한 스포티파이상에서는 ‘0’이다.
#9. 몇 곡을 채 발표하지 못하고 떠난 고인의 빈자리는 그러나 너무 크게 느껴진다. 앞으로 오랫동안 재즈 클럽에 갈 때마다 영화 ‘라라랜드’의 마지막 시퀀스가 떠오를지도 모르겠다. 서배스천(라이언 고슬링)의 클럽을 찾은 미아(에마 스톤)처럼, 박 선생이 어느 날 뒷문을 삐걱 열고 들어오는 허허한 상상을 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는 그의 바람대로 오직 음악으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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