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을 숫자로 계량할 수 있을까[임희윤 기자의 죽기 전 멜로디]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8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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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즈 보컬 고 박성연 씨의 1982년 무렵 모습. 척박한 땅에서 재즈의 텃밭을
지킨 정원사였다. 페이지터너 제공
재즈 보컬 고 박성연 씨의 1982년 무렵 모습. 척박한 땅에서 재즈의 텃밭을 지킨 정원사였다. 페이지터너 제공
임희윤 기자
임희윤 기자
요즘 세계 음악계에서는 다니엘 에크가 화제다. 가루가 되도록 입방아에 오르고 있다. 세계 최대 음원 서비스 플랫폼인 스포티파이의 최고경영자(CEO) 말이다. 이달 초 어떤 인터뷰에서 그가 “음악가들이 3, 4년에 한 번씩 신작을 내면서 그걸로 족하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는 취지로 말한 것이 논란이 됐다. 매일 수많은 신곡이 쏟아져야 운영이 잘되는 부유한 플랫폼 사업자의 관점에서 예술의 가치를 일차원적으로 재단했다는 이유에서다.

미국 음악평론가 스티븐 하이든은 “거머리가 숙주 보고 충분한 피를 좀 생산하라며 호통 치는 격”이라고, 영국 일간 가디언은 ‘황금알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자는 꼴’이라고 비판했다. 스포티파이가 음악가들에게 배분하는 수익은 적은 반면 스스로는 어마어마한 부를 쌓고 있다는 비판이 안 그래도 수년째 음악계에 제기돼온 터. CEO가 기름을 부은 것이다.

#1. 스포티파이는 숫자의 플랫폼이다. 아티스트별로 한 달간 청취 횟수를 1단위까지 보여준다. 앨범, 노래, 음악가를 숫자(와 수익)로 판단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매우 자연스러운 일일 수 있다. 이를테면 스포티파이에서 아일랜드 음악가 데이미언 라이스 페이지에 들어가면 라이스의 사진 아래 ‘월별 청취자 277만3012명’이라는 숫자가 먼저 소비자를 반긴다.

#2. 물론 정확한 통계는 음악가와 관계자들에게 귀한 정보도 된다. 따라서 음악계의 분노는 차라리 거대 산업 시스템의 거대한 무감각에 대한 경악에 더 가까울 것이다. 수치로 따질 수 없는 예술의 가치에 관한, 그리고 계량할 수 없는 예술 창작에 대한 무지를 향한 공포…. 에크의 관점에서 보면 2014년 3집을 낸 뒤 6년 만에 달랑 싱글 하나를 낸 라이스는 게으른 음악 노동자의 표상, 비판받아 마땅한 ‘납품업자’다.

#3. 23일 별세한 국내 1세대 재즈 보컬 박성연 씨는 40여 년간 단 세 장의 앨범을 냈다. 누군가는 ‘겨우 3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 흔한 디지털 싱글이나 EP(미니앨범)도 없으니…. 그나마 1집(1985년)은 ‘박성연’이 아니라 ‘박성연과 Jazz At The Janus’의 이름으로 냈다. 그렇다. 그는 국내 최초의 토종 재즈 라이브 클럽 ‘야누스’(현 ‘디바 야누스’)의 창립자이자 운영자였다. 근 30년간 적자에 허덕이면서도 재즈 클럽 야누스를 지킨 고 박성연 씨의 노고는 과연 숫자로 계량할 수 있을까.

#5. 박 선생은 한국 재즈의 대모다. 그가 1978년 문 연 야누스는 한국 재즈 1세대를 배양한 토양이 됐다. 한국 재즈 연주자들은 재즈 자체의 발전은 차치하고라도 대중가요에 고급스러운 연주를 제공하는 장인의 역할도 했다. 야누스는 한국 대중음악의 질을 한 차원 높인 비밀의 정원이었고, 박 선생은 숨은 정원사였던 셈이다.

#6. 정원사는 큰 영광을 누리지 못했다. 당신 역시 미8군에서 재즈를 배웠지만 동료 가수들이 가요계로 나아가 성공을 거두는 동안 야누스 운영난에 허덕이며 가난한 배를 솔(soul)로 가득 채웠을 뿐이다. 병환으로 요양병원에 들어가며 클럽을 후배에게 맡겨 둔 뒤, 말년에는 오랜 신장투석으로 심신이 시달리면서도 기회가 될 때마다 마이크를 잡았다.

“괜찮다. 이 모든 것(어려움)이 내 블루스를 더 깊게 만들어줄 테니까.”(2010년 다큐멘터리 영화 ‘브라보! 재즈 라이프’ 중)

#7. ‘산다는 건 신비한 축복, 분명한 이유가 있어’(‘바람이 부네요’ 중)

이 곡을 지어 박 선생에게 헌정한 피아니스트 임인건은 몇 년 전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누군가는 재즈의 고향은 미국 뉴올리언스라고 하겠죠. 요즘 젊은 연주자들은 보스턴의 버클리음대에서 재즈를 배워서 와요. 하지만 누군가 제게 대한민국 재즈의 고향이 어딘지를 물어본다면 야누스라고 답할 거예요.”

#8. 스포티파이가 곧 국내에 정식 서비스를 시작한다. 며칠 전부터 메뉴 일부를 한국어로 표시하기 시작했다. 케이팝과 각종 가요 음원 다수는 이미 몇 해 전부터 이 플랫폼에서 서비스가 되고 있다. 박성연 씨의 항목은 아직 없다. 그를 숫자로 표시한다면 최소한 스포티파이상에서는 ‘0’이다.

#9. 몇 곡을 채 발표하지 못하고 떠난 고인의 빈자리는 그러나 너무 크게 느껴진다. 앞으로 오랫동안 재즈 클럽에 갈 때마다 영화 ‘라라랜드’의 마지막 시퀀스가 떠오를지도 모르겠다. 서배스천(라이언 고슬링)의 클럽을 찾은 미아(에마 스톤)처럼, 박 선생이 어느 날 뒷문을 삐걱 열고 들어오는 허허한 상상을 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는 그의 바람대로 오직 음악으로 기억될 것이다.

임희윤 기자 imi@donga.com
#음악#숫자#계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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