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문율’에서 배운다[오늘과 내일/김종석]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8월 29일 03시 00분


스포츠에서 상대 헤아리는 배려
이 험한 시대에도 지켜야 할 미덕

김종석 스포츠부장
김종석 스포츠부장
‘한만두’를 아십니까. 분식 얘기는 아닙니다. 코리안 특급을 떠올린다면 야구에 제법 관심이 많다고 인정받을 만합니다.

박찬호는 LA 다저스 시절 세계 야구 역사에 전무후무할 기록 하나를 남깁니다. ‘한 이닝에 만루 홈런 두 개’를 허용한 거죠. 주인공은 페르난도 타티스(세인트루이스)입니다.

21년도 넘은 이 사건을 소환한 건 타티스가 24세 때 낳은 아들 타티스 주니어(21) 때문이죠. 야구 2세로 샌디에이고에서 맹활약하고 있는 ‘한만두 2세’가 최근 텍사스와 맞붙었을 때입니다. 10-3으로 앞선 8회 초 1사 만루에, 볼카운트 3-0에서 그는 치기 좋은 한가운데 속구를 제대로 받아쳐 담장을 넘겼습니다. 시즌 11호 홈런으로 이 부문 리그 1위에 올라섰죠.

그 옛날 아버지의 만루홈런만큼 관심을 끌었던 이유는 야구의 불문율 논란에 불을 붙여서입니다. 야구에서 크게 앞선 팀은 희생번트나 도루 등을 하지 않습니다. 만약 어기면 빈볼로 응징하거나 벤치 클리어링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타티스 주니어의 홈런이 나오자 교체된 텍사스 투수는 다음 타자의 등 뒤로 공을 던졌습니다. 텍사스 감독은 경기 후 불쾌한 감정을 드러냈습니다. 샌디에이고 감독도 ‘타티스가 기다리라는 사인을 못 본 것 같다’고 미안함을 표시하더군요. 일종의 묵계를 깨뜨린 걸로 본 거죠. 타티스 주니어 역시 “몰랐다. 다음엔 치지 않겠다”며 사과했습니다.

하지만 반론도 거세게 일었습니다. 충분히 홈런을 노릴 만했다는 거죠. 그를 두둔하는 동료 선수들과 현지 언론의 목소리가 쏟아졌습니다.

야구처럼 다른 스포츠도 비슷합니다. 점수 차가 크게 벌어지면 지나친 개인기나 세리머니를 자제합니다. 축구는 쓰러진 선수가 나올 경우 볼을 밖으로 내보내 경기를 중단시킨 뒤 상태를 보거나 치료하게 합니다. 농구에선 4쿼터 막판 승패가 갈리면 작전 타임이나 반칙 작전을 쓰지 않습니다. 배구에서 결정적인 스파이크나 블로킹을 성공시켜도 네트 너머 상대를 바라보며 환호하지는 않습니다.

국민타자 이승엽은 국내 최다인 통산 467홈런을 날렸습니다. 실력만큼이나 인성도 남다르다는 평가입니다. 홈런을 친 뒤 고개를 숙인 채 빨리 베이스를 돈다거나 겸손한 멘트로 찬사를 받았습니다. 3볼, 0스트라이크에서 친 홈런은 1%도 안 되는 4개더군요. 이 대목에서 이승엽에게 전화로 물었습니다. 타티스 주니어 같은 상황이라면 어떻게 했겠느냐고. “저라도 무조건 쳤을 겁니다. 프로라면 최선을 다하는 게 맞는 겁니다. 7, 8점 차가 뒤집어질 수도 있고요.”

그 역시 상대 투수가 자신이나 동료를 삼진으로 잡은 뒤 어퍼컷이라도 날리면 열 받는다고 합니다. 한국시리즈 같은 단기전에선 기싸움이 중요하기에 홈런 뒤 액션이 커진다고 하네요.

전통이나 동업자 정신만 강조하다가 게임의 극적인 요소를 반감시키면 안 될 일입니다. 맥 빠진 엔딩을 원하는 팬들은 없습니다. 열린 해석으로 의외성이나 이슈가 불거진다면 관전의 맛을 더하는 양념이 됩니다.

이승엽은 자신의 카카오톡 상태 메시지에 ‘반구저신(反求諸身)’이라는 고사성어를 적어뒀습니다. ‘남 탓을 하기보다는 스스로에게서 문제점을 찾는다’는 의미랍니다. ‘대학’에서는 ‘혈구지도(絜矩之道)’를 강조합니다. 기역자 모양의 직각자로 잰다는 뜻으로 내 마음을 잣대로 삼아 남의 마음을 재고, 나의 심정을 기준으로 남의 처지를 헤아리라는 말입니다.

달라진 시대에 맞춰 불문율도 변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 출발점이 되는 타인에 대한 배려만큼은 늘 중시돼야 합니다. 코로나19 유행의 절박한 위기감 속에서 그 정신은 더욱 절실해졌습니다.
 
김종석 스포츠부장 kjs0123@donga.com
#불문율#프로야구#세리머니#이승엽#한만두#스포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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